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극영 (문단 편집) ==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홍난파]], [[안익태]], [[현제명]] 등 동종의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했던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한때 [[친일인명사전]] 인명부에 등재대상에도 올랐다는 일설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등재되지 않았다. 친일 사유로는 [[일본 제국|일제]] 말기 때 만주에 일제가 수립한 괴뢰국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으로 올랐다. 특히 홍난파나 안익태 등과는 달리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 작곡가로 잘 알려졌고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과거 [[국민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된 사례도 있어서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한 수준이었다. [[강원용]] 목사에 의하면 윤극영이 친일단체였던 '간도협화회'에 참여했고, 자신에게도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그때 간도에는 간도협화회라는 친일 단체가 있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들을 서로 친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조직된 이 꼭두각시 단체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고 고무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회장은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노래 '반달'의 작곡가요 아동문학가였던 윤극영이었다. (중략) >하루는 이 사람이 내게 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협화회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나보고 협화회 일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회유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어차피 세상이 일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인데 협력하여 같이 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겠소?" >"나는 교회 일로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곧 다시 일본에 공부하러 가야 하므로 그런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못될 것 같군요." >내가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이번에는 표정을 바꾸어 그가 말했다. >"그렇게 협력을 하지 않으면 신상에 별로 좋을 게 없을 텐데."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1, 한길사, 143~144쪽]) 유족 측에서는 윤극영의 친일 행적 및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지나치게 고인에 대한 폄하와 매도행위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한 조사에 대해선 머뭇거리고 있기에 비아냥도 많이 받고 있다. [[분류:1903년 출생]][[분류:1988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출신]][[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