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군대학교 (문단 편집) == 기타 과정 == 위에서 언급한 과정은 '[[본과]]'이며 그외 다음과 같은 과정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 전공과(1924~1932) [[학생]]이 특별한 수업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각자가 관심을 가진 분야를 1년간 자유롭게 연구하여 1년 후에는 [[논문]]을 제출하게 되는 과정이다. 학생을 [[헌병]]을 제외한 각 [[병과]]의 [[중좌]], 소좌 중에서 고등용병에 관한 학술의 심후한 연구를 하기에 적당한자가 선정된다. [[1924년]]에 시작되어 매년 10명씩 선발하였다. 연구주제는 '정략과 전략'. '연합군작전과 대연합군작전', '클라우제비츠와 손자를 비교연구' 같은 것이었다. 전공과제도는 장군이 될 인재의 양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기에 적합한 자질과 능력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중앙부와 부대의 요직에 있었으므로, 그 상관들의 동의를 얻어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또한 학생을 지도할 만한 수준의 교관을 배치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전공과는 그 설립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8기생 10명의 입교를 끝으로 [[1932년]] 폐지되고 학생들은 중도에 퇴학하게 된다. * 전과(1933~1943) 본과의 입학 시험 당시 부대업무나 기타 사정으로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거나, 본과의 선발시험에 불합격한 [[사람]]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입교시키는 제도였다. 따라서 전과학생은 본과학생보다 [[나이]]가 많고 계급도 대위~소좌였으며, 수학기간은 1년이었다. 이는 군비확장에 수반된 막료요원의 보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사단급 부대의 막료 양성이 주된 목적이었다. 전과학생은 졸업증서는 수여 받지만, 이른바 '천보전'은 받지 못했다. 한편 본과졸업생이 받던 천보전은 [[1937년]] 폐지된다. [[1933년]] 전과에 입교한 1기생은 9명이었지만, [[만주사변]] 이후의 군비확장으로 막료요원의 주된 보충원이 되었다. 이에 1937년에는 일거에 44명으로 늘어났고, 다음 해 [[1938년]]에는 70명으로까지 급증한다. 하지만 [[1943년]] 12기 6명의 졸업을 최후로 이 제도는 폐지된다. 폐지 이유는 전황악화로 장교들을 입교시킬 여유가 없어서. * 항공학생(1937~1938) [[1937년]]에 만들어져 항공관계 전공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항공병과 장교의 소모가 격심하게 되어 항공간부가 부족하게 되자, [[1938년]] 입교의 2기생까지 합계 8명을 졸업시키고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