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형 (문단 편집) ==== 기약없는 해방일 ==== 유형은 기본적으로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언제 풀려날지가 아득하다. 그러니 유배를 시작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나름대로 자신이 풀려 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배운 것이 글쓰기라고 '''"풀어주세요"'''라고 요약할 수 있는 글 쓰기가 많았다. 이를 유배문학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바로 이 유배문학이다. 사실 요즘에도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은 수감자들은 [[판사]]에게 일종의 반성문 같은 것을 제출한다. 게다가 유배된 사람들은 다 글깨나 읽은 사람들이었으니, 상당히 잘 써진 반성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편히 산다고 해도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언제 풀려날 지도 알 수 없고, 언제 [[사형]]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이기에, 그야말로 하루하루 칼날 위를 걸어가는 심정인지라 심적 부담도 컸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경우에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금부도사를 만나게 되니, 심적 충격이 엄청났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언제까지 유배를 당할지 몰랐는데,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유배당하기도 하고, [[윤선도]]처럼 4번에 걸쳐 무려 25년을 유배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윤선도는 물려받은 재산이 워낙 크다 보니, 유배 기간에 맞먹을 만한 기간을 은거하며 즐겼다.] 야사에 따르면 벽파 집권기에 [[정약용]]이 귀양간 후 시파인 [[김조순]]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가지고 있던 부채에 정약용의 시가 적혀 있었으나 그 지은이를 모르고 있어서 궁금해 하다 주변에서 "그거 귀양 가 있는 다산이 지은 시임"이라고 가르쳐주고 나서야 '''"아니, 귀양가 있는지 18년이나 됐단 말이냐?"'''이라고 놀라 귀양에서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야사에 불과하다. 유배 보내고 죽든 살든 잊어버리는 것은 위에도 써있듯이 일반 잡범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명문가 출신의 고위 관료를 유배를 보내놓고 잊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약용이나 윤선도 급의 명문가 출신 관료가 장기간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를 당한 것은 그만큼 단단히 찍혀있었다는 뜻이지, 까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정약용]]의 유배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별거없고, [[가톨릭]] 신자라서 그랬을 뿐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라면 서구 열강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는 인식이 박혀있기 때문인데, 정약용 본인도 이 사건때문에 정계에서 축출당하여 유배를 간 것이다. 그나마 [[정조(조선)|정조]]가 총애하던 신하라는 점과 더불어 선술한 야사에도 언급되는 [[김조순]]과 친밀한 사이였던지라서, 일단 본인은 처형당하는 것을 면한 것은 물론, 18년이 지나서 여론이 잠잠해지자 바로 해배될 수 있었을 뿐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인 대신들은 정약용급 범털이 아닌 이상에야 유배지에서 평생 살게된 거면 그나마 다행이고, 보통은 그냥 처형당했다.]. 당장 그 사람의 친인척, 친구, 동문, 정적, 원수가 가득한 곳이 한양이다. 일례로 정약용에 비해 서얼 출신이라 신분도 떨어지고 관력도[* 정약용은 정3품 형조참의(차관보급)까지 역임했지만, 박제가는 최고로 올라간게 겨우 종6품 현감, 현령 정도였다.] 낮았던 박제가만 해도 정순왕후가 직접 석방명령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