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형 (문단 편집) ==== 유배생활 ====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택 연금이나 다름없어서, 주막이나 정해진 집과 주변 지역 이외에는 관리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바깥으론 못 나갔다. 유배지는 대부분 보낸 지역에 계속 보내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는 유배된 자들을 위한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당한 죄인의 생활비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없으면 유배지에서 본인이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당상관 정도 되면 이를 대비하기 위해 [[상인|상단]]을 휘하에 두는 경우도 많았다. 평소에는 그 상인들을 휘하에 두고 비호해주다가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면 같이 데려가서 그들이 벌어다 바친 돈으로 먹고 살게 된다. 또한 유배인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민 중 형편이 조금 되는 사람을 보수주인으로 지정해서 돌봐주도록 하지만, 당연하게도 험준한 곳에서 물자가 많이 생산될 리가 없으며, 당장 먹고 사는 것과 조정으로 보낼 세금까지 생각하면 유배당하는 자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유배온 사람은 [[자급자족]]조차 어렵고 험악한 환경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로 연명하거나 제대로 된 의식주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가끔 가족들이 물건을 보내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워낙 멀고 험악한 지역인지라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 당장 [[제주도]]에 귀양 온 추사 [[김정희]]의 경우는 집에서 보내온 음식물의 태반이 썩어서 버렸고, 젓갈류만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젓갈을 더 보내 달라"고 했을 정도다.[* 이걸 가지고 어느 지상파 프로그램에서는 앞뒤 부분을 싹 자르고 추사 김정희가 젓갈을 즐겨먹었다고 왜곡했다. 당연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김정희는 이 즈음 상술한 먹는 문제와 더불어 재혼한 부인마저 사망하는 바람에 힘든 시절을 보내야했다.] 이것도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에는 가족, 친지, 친구 등이 대부분 사분오열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양가 떨어지는 음식을 먹여 죽게 만드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며 쌀가루와 소금만을 개어 먹여 [[영양실조]] 상태로 죽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느 정도 덕망이 있는 자가 귀양을 가거나 높으신 분이 정계의 파워게임에서 밀려서 낙향하다시피한 경우는 지방관의 배려를 받아 외출이나 식사도 제공받을 수 있다. 사실 이 경우는 중죄인 처벌이 아닌 정적 추방의 성격이기에 최소한 먹고 살만한 지원은 해주는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은 귀양 온 마을의 [[훈장(직업)|훈장]]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흉악범이나 파렴치범도 아니기 때문에 남보기 부끄러울 것도 없다. 귀양도 어느 정도 클라스가 있어야 보내다 보니 현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순기능도 있었다.[* [[맹꽁이 서당]]의 훈장도 설정상 귀양 온 정승이었고 누명이 풀려서 병조판서로 복귀한다는 설정. 허나 그 주제에 [[금강산]]을 유람가거나 못해먹겠다고 떠나겠다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잦은 휴재로 인한 [[설정오류|돌려막기]]라는 점은 감안하자. 그런데 병조판서를 할 정도의 [[고관대작]]이라면 일개 꼬마들이나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 된다는 건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김굉필이 조광조를 가르친 것처럼 명망 있는 관료가 유배를 오면 성인 제자들을 양성하지 천자문이나 가르치지는 않는다. 물론 어차피 허구의 인물이므로 꼬마들을 가르치는 것이 본인의 선택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사실 성인제자 가르치는 게 더 쉽다.~~] 꼭 고관대작이 아니더라도, 일단 벼슬이 있다는 것은 그 어려운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공부에는 도가 텄다는 게 기정사실이라 자식의 과거 급제가 일생일대의 소원이지만 주변에 이렇다할 지식인이 없는 지방 양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는 영화 <자산어보>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유배도 종류별로 고생하는 급수가 달랐다. 가장 심한 건 대역죄인들이 받는 위리안치형이고, 가장 가벼운 유배형으로는 본인이 원하는 곳을 스스로 고르게 하는 자원부처를 들 수 있다. 이 경우면 자기나 처가의 농장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니(웬만한 중앙 관리라면 지방에 농장 정도는 있는 경우가 많았다),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또한 서울에 들어오는 것만 금하고 아무데나 다닐 수 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면 중앙 정계에서 잠깐 빠져서 머리 좀 식히거나 반성 좀 하고 오라는 것이니, 곧 복귀하는 게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지방민이나 지방관들이 잘 대해주었다. 그것 때문에 이른바 '''유배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유배를 왔다고는 하나 유배당하기 전 매우 높은 사람이고, 그래서 얼마 못가 유배가 풀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이 그 유배자에게 상당히 좋은 음식으로 대접했다. 단순히 나중에 불똥 튈까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렇게 유배 온 사람들은 일반 잡범이 아니라 정계의 거물들이고, 당연히 지역 수령하고도 직접 안면이 있거나 하나 건너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중앙 정계의 유력인사와 친해지는 것은 지방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투자가 될 수 있다. 일례로 [[장희재]]의 경우는 [[희빈 장씨|여동생]]이 중전마마를 한 적이 있는 사람에 '''장희재 본인이 세자의 외삼촌'''이기까지 했으니 유배를 가서는 되려 그 곳의 지방 사또를 마치 자기 몸종부리듯 하는가 하면 유배생활을 하는 주제에 한성판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이라고 들먹거리는 우스운 짓거리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관복까지 입고 다녔다.[* 장희재는 실제로 한성부 좌윤까지 지내긴 했고, 조선시대에는 파직당한 사람도 웬만하면 전 직함을 불러주는 게 예의였기 때문에 예전 관직을 자칭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장희재와 관련된 비행을 빼곡히 적은 숙종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역모에 연루되어 복귀 가능성이 없는 중죄인들은 극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은 정말 일반 잡범들이 유배를 온 경우가 있는데, 당연히 이들을 애써 돌봐줄 사람은 없기 때문에 낯선 고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벌어먹어야 했다. 게다가 관료 출신이 정쟁에 패해 유배를 온것이라면 역모가 아닌 한에는 어떻게든 풀려날 가능성이 제법 있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대단히 좁아서, 혈연 혼맥 등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유배 보내고 잊어버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반 잡범은 정말로 유배 보내고 잊어버리고, 그게 유형의 목적이기도 해서 풀려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나마 풀려날 가능성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포하는 사면령 정도. 강상죄와 강력 범죄에 연루된게 아니라면 보통 잡범은 안치를 당했더라도 사면해주기 때문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0404022_001|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내린 사면령]]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 이달 22일 새벽 이전을 기준으로 하여 모반·대역과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해·구타·매도하였거나, 처첩이 남편을 모살했거나 노비가 주인을 모살(謀殺)했거나, 고의로 사람을 살해했거나, 염매(廉魅) ·고독(蠱毒)을 했거나, 국가의 강상에 관계되거나, 장오(贓汚)나 강·절도를 제외한 잡범의 사죄 이하 도(徒)·유·부처·안치·충군된 자는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았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사유(赦宥)하여 준다. 감히 유지(有旨)가 있는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할 경우에는 그 죄로 죄주겠다. ..."] 그러나 당연히 저런 사면령이 자주 내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도 가능성이 희박한 건 비슷하다. 또한 훈장 수준에서 더 나아가 나름대로의 학문을 연구하고 지역의 지식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지역의 지식인의 핵심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무오사화]]로 유배온 [[김굉필]]은 그 동네에 부임온 관리의 아들인 [[조광조]]의 스승이 되었고, [[정약용]]의 경우에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목민심서]]까지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도 유배생활 중에 썼다. 이런 식으로 귀양온 유배인들의 도움을 톡톡히 본 지역이 바로 '''제주도'''인데,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을 제주도에서는 '귀양다리'라고 불렀고, 이들 '귀양다리' 가운데는 우암 [[송시열]]이나 추사 [[김정희]] 같은 네임드 유학자들도 많았다. 제주도가 육지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임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이유가 이들 덕분. 현재 제주도에서는 도 차원에서 유배인들의 행적이나 유형인들이 당시 살았던 집터를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제주도로 유배와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첩까지 들여 사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서두에서 퍽 냉소적이고 비아냥 대는 어조로 이들의 유배생활을 묘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