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혁로 (문단 편집) == 생애 == 1851년 3월 9일, [[충청도]] [[아산시|아산현]](현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하급 무관인 아버지 유상오(柳相五, 1827. 11. 26 ~ 1884. 4. 20)와 어머니 [[상(성씨)|목천 상씨]](木川 尙氏)[* 상안곡(尙安谷)의 딸이다.]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의 영향을 받아 [[개화파]]가 되었다. 또한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에 들어가 급진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1882년 [[어윤중]],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도쿄를 갔다왔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수구파, 온건 개화파 인물들을 제거한 뒤 개화당 내각에 들어갔으나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정난교]], [[이규완(1862)|이규완]]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의 암살 계획을 알아채고 그들에게 알려 암살을 열심히 막았다. 그러나 결국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로 가다가 암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여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들어가 개혁을 주도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894년 [[박영효]] 등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일어난 [[을미사변]]에도 참여했다. 을미사변 직후 망명하게 된다. 그는 [[1910년]] 이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사망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매일신보]]에서는 1940년 유혁로가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한 반면,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94세라는 고령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