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파(삼국지) (문단 편집) == 촉의 화폐 개혁을 주도 == 이후 유비가 익주 함락 후 국고가 부실한 것을 걱정하자 "이 일은 쉽습니다. 다만 100전 짜리 돈을 주조한다면 여러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으니, 관리들로 하여금 관청(또는 관시, 官市)에서 교환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언을 하여, 화폐개혁 정책으로 단 몇 개월만에 부고를 충실하게 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부분에서 《촉서》 〈선주전〉과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은 일견 세세한 부분에서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나, 양립가능하다. 〈영릉선현전〉에는 유비가 "나는 성도의 부고(府庫)를 안 건들겠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여기서 부고(府庫)란 [[https://en.wiktionary.org/wiki/府庫|공공의 관청창고]]를 말한다. 유비는 민간이 아닌 공공창고의 약탈을 허용한것이다.]"고 선언했지만, 〈선주전〉 서술로는 유비가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고 직접 촉성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군졸들에게 크게 베풀었다고 되어 있다. 사실 〈장비전〉이나 《화양국지》에 유비가 제갈량, 관우, 장비, 법정을 비롯한 제장들에게 물품을 하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부고를 연 주체는 익주의 행정을 장악하고 논공행상을 시행했을 유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또 〈영릉선현전〉은 군용물자가 부족하다고 되어 있는데 〈선주전〉에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정사 본전인 〈선주전〉에 따르면 익주의 창고가 무조건 고갈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군용창고는 확실히 고갈되었다. 물론 《자치통감》에도 있는 에피소드고 중국어 위키백과에선 '유비가 촉에 들어오자, 파촉지역은 재정이 혼란에 빠졌고, 유파는 직백전을 주조하고 물가를 균형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중 오수전은 직백전과 함께 건위군에서 주조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라는 책에선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라고 쓰여 있고 바이두 백과 직백오수(直百五銖)문서에는 '연이은 정벌로 재정이 불안해졌는데 큰 값을 가지는 화폐로 간신히 유지시켰고 직백전 발행은 촉한의 경제 발전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서 부고가 충실해졌다.'라는 기술이 있는 등 직백오수를 발행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후한 말 무렵 중국의 화폐경제 상황의 맥락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영제 말기인 186년에 이른바 사출오수라는 돈이 발행된다. 중량이 3.6-4그램 정도 되었다, 이게 동탁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오수전들을 다 부숴다가 조잡한 소전으로 바꾸었다. 이때 동탁의 소전은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5푼짜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고 이걸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0.5-1그램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한마디로 돈의 가치가 순식간에 5~7배 이상 폭락한 것이고 그나마도 불순물이 섞이고 돈으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놔서 돈의 가치를 상실한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그 결과 발생한것이 후한말의 초인플레이션 및 화폐경제의 붕괴로 기존의 수천배에서 수만배의 물가 상승과 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소전의 유통으로 인해 화폐경제가 붕괴되었다.[* 특히 익주지방은 관중을 비롯한 각지에서 유이민이 몰려오던 지역이다. 따라서 유이민들이 지닌 동탁의 소전 화폐가 익주에 대량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당장 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마자 발생한 익양대치 당시 오로 넘어간 지역인 형주 장사군만 해도 간독 자료에 따르면 230년대 중반에 쌀 44곡 3두에 8억전이나 든다고 나오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 인플레이션이 일으킨 여파는 광범위하고 지속적이었다.] 이런 상황의 맥락에서 유비가 입촉 후 발행한 직백오수전은 단순히 기존의 화폐에서 가치만 올린 화폐가 아닌것으로,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유비가 처음 만든 직백오수전은 [[https://kknews.cc/collect/qjzoey.html|8~9.5그램의 중량급 화폐]]였다. 금속의 무게를 기준으로 이전 사출오수전에 비해서도 2~3배, 동탁의 소전에 비하면 최대 20배 가까운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초 인플레를 부른 동탁의 소전에 비해선 양화[* 특히, 동탁의 소전 유통으로 이미 초인플레이션이 터져 오수전의 가치가 폭락한 상태임을 고려하면 직백오수전의 발행은 화폐 가치가 낮아진 당시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인정하여 단위 화폐의 리디노미네이션과 유사한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였고 금속의 가치만으로도 이미 교환수단으로서 가치를 상실한 소전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관시에서 유통된 직백오수를 익주 주민들이 저축하기 위해 관시를 이용하였고 그로 인해 익주의 물자를 유비가 축적하는것이 가능했을 공산이 있다.[* 관청에서 여는 시장에서 직접 교환이 가능했다는것은 정부가 화폐가치를 보장한다는 화폐가치 신용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또한 유파전, 선주전, 조운전을 종합하면 유비의 입촉 이후 임시적으로 시행되었던 경제정책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군수물자가 부족해서 부고를 채우는 수준이 아니라, 유파는 직백전을 발행하고 관리들로 하여금 관시를 열어 물가를 균등하게 안정시키면서 국가가 민간 상업활동에 참여해 물품을 구매하자는 정책을 제안한 것이고, 조운은 옥사, 원지, 상전을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부역과 조를 거둬들이자고 한 것이다. 그리고 유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선주전'에서 '(백성들에게)곡식과 비단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이런 정책은 국고를 충실히 하면서 내부 백성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일거 양득의 효과를 가져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