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치송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이 출범할 때 [[구색정당|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한국당]]의 총재가 되었다.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사실 신군부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출마를 한 것에 불과했지만 7.7%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어서 1981년 3월에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평택군-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정책야당을 표방하며 제1야당의 총수로 활동하였으나 당시 [[김영삼]], [[김대중]] 등 유력 야당 정치인들이 모두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민한당에서 나름 온건파를 대변했기에 "[[사쿠라(정치)|사쿠라]]"로 낙인이 찍혔다. 거기다가 1985년에는 민주한국당 창당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개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야당 정치인들에게 어용 야당, 관제 야당 총재, 여당의 [[2중대]] 등의 소리를 듣었다. 짐작이 어느정도는 되는 이야기지만 유치송의 이런 [[바지사장|바지총재]] 자리는 [[신상우]] 사무총장 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공천권도 전혀 없이 무력했다. 그러나 훗날 드러난 것은 정작 민한당의 공천을 좌지우지하던 신상우도 기실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방준필 서울분실장)에 휘둘리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송탄시]]-평택군-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자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5선). 그러나 [[신한민주당]] 돌풍에 민주한국당이 제1야당 자리를 뺏기고 [[군소정당]]으로 전락되는 참패를 당하자 그 해 3월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그 사이 총재직은 [[조윤형]]이 잠깐 대신하였다. 그러다가 그 해 9월 다시 총재로 추대되었다. 지역구 내에서 의정활동으로는 [[안성시|안성군]]의 [[공도면]]과 [[원곡면]]의 5개 리를 [[평택시|평택군]]으로 [[편입]]시켰으며 평택역을 신축하였으며 [[안성선]]을 폐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평택시-송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권달수]]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이후 민주한국당이 단 한 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거나 전국 득표율 2%를 넘지 못해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당은 [[통일민주당]]에 흡수되었으며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