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종원 (문단 편집) == 생애 == 773년에 [[시안(도시)|장안]]에서 태어나, 어머니 노(盧)씨의 높은 교육열 덕에 792년 20세의 나이로 1차 과거시험에 합격해 향공(鄕貢)이 되었고 1년 뒤인 793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5년 뒤인 798년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한, 젊은 시절엔 시험만 보면 합격하는 수재였다. 그마저도 5년 동안 시험을 보지 않은 것은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였다고. 이때 진사시와 박학굉사과에 함께 합격한 [[유우석(당나라)|유우석]]과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801년에 정6품인 남전위(藍田尉)가 되었으며 805년 2월에 [[당덕종]]이 붕어하고 새로 즉위한 [[당순종]]에 의해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 등과 함께 등용되어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하여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들을 억제하고 부패를 막아 황권을 강화하는 영정혁신(永貞革新)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이 이에 저항하여 수구파 세력과 연합해 같은 해 8월에 황태자 [[당헌종|이순(李純)]]을 옹호하여 순종을 몰아내고 왕비, 왕숙문은 죽여버림으로써 180여일 간의 혁명은 실패하였고 유종원은 805년 9월 소주(邵州)[* 현 [[후난성]] 신화(新化) 현]의 책사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2개월 만에 또 좌천되어 영주(永州)[* 현 [[후난성]] 소재] 사마가 되어 이동 중에 거처도 못 구하여 잠시 용흥사(龍興寺)에 머무르는 신세가 되고, 그로부터 6개월 뒤 모친상을 당한다. 아래의 시 강설(江雪)은 유종원이 영주 사마로 좌천되었을 때 느꼈던 외로움을 시로 옮겨 지은 것인데, 유종원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라 할 수 있다. >{{{+2 江雪 (강설)}}}[br]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 (만경인종멸) >孤舟簑笠翁 (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br] >수많은 산에 나는 새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길에 사람의 발길은 끊겼도다. >외로운 배 위의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는 >눈 오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도다. 현대 한국의 보급용 한자 병풍에도 이 강설이 흔히 들어간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 이제는 드물어 잘 모를뿐. 게다가 의외로 이 작품은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출제된 적 있다! 수능 역사를 통틀어 출제된 단 셋 뿐인 외국 문학작품. 나머지 둘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과 유종원과 같은 당나라 시대 시인이었던 [[두보]]의 강촌. 10년 뒤인 815년, 영주의 산수를 유람하고 현지 사람들과 사귐과 동시에 정치, 역사, 문학, 철학 등 다방면의 학문을 연구한 내용을 다룬 수필집인 영주팔기(永州八記)를 완성한 뒤 그곳을 떠나 장안으로 돌아갔으나, 장안에 자기 반대파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같은 해 3월 유주(柳州)로 발령받아 그곳의 책사가 되며 4년 뒤인 819년에 그곳에서 향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