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재흥 (문단 편집) ==== [[영천 전투]] ==== [[파일:유재흥다부동.jpg]] 1950년 8월 다부동 전선에서 유재흥 2군단장 지연작전기간(1950.7~8월. 한강방어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철수 과정)에서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군인)|김홍일]] 소장)의 부군단장으로서 수 차례의 지연전투를 지휘하며 낙동강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한 유재흥 준장은 1950년 7월 한국군의 두 번째 군단인 제2군단 군단장이 되었고 9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북한군의 9월 공세에서 8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방어선이 안정돼 있던 2군단 예하 1, 6사단에서 증원병력을 쉽게 차출하기 위해 2군단으로 소속이 변경됐는데, 이에 따라 [[영천 전투]]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즉, 유재흥 군단장은 [[백선엽]] 1사단장, [[김종오]] 6사단장의 직속상관으로서 예하 병럭과 8사단 등의 배속 병력을 모두 맡아 영전대회전을 총지휘한 것이다. [[파일:유재흥다부동2.jpg]]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제29연대 CP를 방문한 유재흥 2군단장 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영천 시내를 피탈당한 8사단장 [[이성가]] 대령에게 사단 병력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하여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토록 한 후,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차출하여 이전에 증원된 7사단 5연대, 8연대와 함께 영천 시내로 역습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습 위협과 지형상의 문제로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았던 북한군 15사단의 공세탄력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9월 9일 2군단장 명령에 의거, 영천 일대에 낚싯바늘 형태로 포진한 한국군 6개 연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완전히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와해됐고, 한국군은 영천 시내는 물론 북방의 고지군까지 장악하면서 13일 경에는 원 방어진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드라마틱한 승리로 바꿨다는 점에서 '대회전'으로 평가된다. 유재흥 준장은 영천 전투에서 8사단을 2군단 예하로 예속 변경한 육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예하부대에서 절약한 병력을 차출하여 역습, 영천 탈환이란 부여된 목표를 달성함은 물론 북한군 15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영천 방면에서 국군의 선전으로 사실상 적화통일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정일권]]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재흥 준장은 군단 좌인접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Hobart Gay) 소장에게 영천의 상황이 급박하니 전차 1개 소대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왜관 정면도 전황이 좋지 않아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정일권에게 군단장이 돼서 고작 전차 다섯 대를 빌리러 갔다 퇴짜를 맞는 가난한 지휘관임을 한탄했다고 한다.[* 얼마나 다급했었으면, 거절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노획한 T-34를 수리하여 기갑연대 잔여 병력과 일본군 소년전차병 출신 장병들을 모아 써먹으려는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월튼 워커]]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게이 소장에게 증원을 지시한 덕분에 2군단은 영천 방면 역습에서 미군 전차소대를 요긴한 직사화력 플랫폼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영천전투에서 전차 빌린 건 정일권의 회고록엔 자기가 워커 장군한테가서 따졌다는데 관련 논문에선 유재흥 본인이 워커 장군한테 간 걸로 나온다.] 북한군 전차에 당하기만 하다 드디어 아군 전차가 나타나자 보기만 해도 사기가 올라가는 국군 장병들은 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