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장(삼국지) (문단 편집) === 부정적인 평가 === 촉서유이목전을 보면, 조위의 난 당시 '장로의 부곡이 파서 일대에 있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오두미도 세력이 익주에서 한중 뿐만 아니라 파서 일대에 이르기까지 세를 넓히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고도 장비를 파서태수로 임명하고 제갈량이 장로를 까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에 장로의 세력을 흡수한 조조군이 파서까지 침공한 것을 보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유장 시기의 익주는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어 군사적 대립이 있었다. [[후한서]] 유언전에 따르면 장로는 유장이 어리석고 겁이 많으며 줏대가 없어, 명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유장이 노하여 장로의 모친과 그의 동생을 죽이고, 그의 장수 방희 등을 파견해 장로를 공격하나, 자주 격파당했다. 장로의 부곡이 다수 파 위에 있었기에,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았는데, 장로가 이를 습격해 취하여, 마침내 파, 한에서 웅걸이 됐다고 했다. 또 [[화양국지]]에는 유장이 유약하고 결단력이 적어, 장로는 점점 한중에서 교만해졌고, 파이(巴夷)인 [[두호]](杜濩), [[박호]](樸胡), [[원약]](袁約) 등이 배반해 장로에게 이르렀다. 유장이 노해, 장로의 모친과 동생을 죽이고, 화덕중랑장(和德中郎將) 방희를 파견해 장로를 토벌하게 하나, 이기지 못했다. 파인들이 나날이 배반해,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아, 낭중에 주둔해 장로를 막게 하니, 방희가 의당 병위(兵衛)가 필요하다고 해서, 번번이 한창(漢昌)의 종(賨, 공물을 바치는 이민족 백성) 백성을 불러 병사로 삼았다고 한다. 즉, 유장이 유비와의 3년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다고 하기 전부터 이미 파 일대는 유장과 장로의 싸움터가 되었고 다른 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게 적어도 수십 년은 갔다는 것이다. 또, 유비가 성도를 공격하려고 하자 죽기를 각오하여 수성하려고 한 3만 백성들은 동주병들, 혹은 그들의 2세, 3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위의 반란을 격파하고 눌러앉은 그들이 유장과 연을 끊고 흩어졌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유장의 덕을 칭송하는 이 에피소드는 180도 달리 볼 수 있다. 유독 유장이 있던 성도의 백성들이 항전하려고 하였고 유장이 항복하자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그들이 유장과 가까운 관계였다거나 혹은 유비라는 침략자가 성도에 입성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비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여러 정책을 펼치면서 익주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유비에게 저항한 자들도 많았지만, 투항한 자들도 많았다. 이엄, 비관, 비시 등이 있다. 허정은 유장 세력의 중심지역인 촉군 태수였는데 성도가 포위되자 투항하려고 했었고 말이다.[* '유장이 항복하니 다들 항복하지 별 수 있나'라는 식의 의견도 있으나, 유비라는 침략자에 대하여 호족들이나 명사들, 유장 휘하의 신하들이 저항이나 투항을 결정한 것은 오로지 그들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으로 백성들이 유장을 따랐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여몽이 형주를 취하자 저항이 없었으니 익주가 더 충성스러웠다, 관우의 장악력이 의심된다, 이런 의견도 있는데 대놓고 쳐들어온 유비와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관우군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무리다. 더욱이 남군은 오로지 미방만이 항복했으며 여몽에게 저항한 증거가 남아 있고 육손에게 맞선 지역들도 있었으니 이 주장은 설득력이 미흡하다.] 또 유장이 집권한 직후 동주병들의 횡포나 유장이 집권하던 와중에 '유장의 이런 점이나 호족들의 이런 점은 다소 아쉽다'라는 비판은 있지만 오히려 유비가 그런 행동으로 익주민들의 원성을 샀다는 기록은 없다. 유비의 인재 기용도 선비들이 앞다투어 귀순했다고 하는데, 이는 유장을 바라보는 호족들의 인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장이 떠난 이후 유비가 유장이 멀리하던 사람들, 유장의 친인척 할 것 없이 고루고루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를 바로 잡으면서 '익주 사람들 전체가 크게 화합하게 되어'([[자치통감]]) 잊히게 되었지만. 그런가하면 촉과 제정, 역사 설치, 직백오수 주조, [[왕련]]의 사염 정책 등 오히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실행한 정책들이 많다. 유장 치세에 유장을 섬겼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어디를 역임했다 정도로 끝나거나 두루뭉술하게 공로가 있었다는 정도일 뿐이다.[* 다만 이는 유장이 위촉오의 군주가 아니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삼국지의 열전은 위촉오 장수들과 그에 속하지 않은 군벌들의 열전이다. 원소, 원술, 유표, 유장 등의 부하들은 따로 열전이 없어 매우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다. 예로 법정과 황권은 열전이 있지만 장송과 왕루는 열전이 없다. 즉 유장 치세의 행적을 분명하게 단언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치세 후반에도 방희, [[이이(삼국지)|이이]], 장로와 반목하고, 유장 휘하 장수인 [[습숙]]이 남군공방전 당시 동오에 항복하는등 그의 정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데 실패했던듯 하다. 이는 유비를 부르자고 법정이 간언할 때 지금 주 안의 여러 장수인 방희, 이이 등은 모두 공을 믿고 교만하며 멋대로 굴고, 두 마음을 가지고자 하니, 예주(유비)를 얻을 수 없으면, 적은 밖을 공격하고, 백성은 안을 공격해, 필시 무너지는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즉 익주 인심이나 유장을 따르던 장수들은 언제든지 유장을 배신할 여지가 컸다는 얘기다. 실제 유비가 공격했을 때 그렇게 되었고. [[장로(삼국지)|장로]], [[조위#s-1]], [[감녕]], [[심미]], [[누발]] 등이 대표적인 유장 시절 모반자들이다. 특히 조위처럼 유장을 익주자사로 추천한 사람마저 배신해 성도를 포위할 정도였다. 그 밖에도 [[영웅기]]에는 동주병들이 백성들을 침략하고 폭행해도 막지 못하고 법령에도 문제가 많아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동주병과 결탁해 조위를 물리친 다음 이들을 어떻게 제어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주 토박이들이 유장에게 가지는 불만이 결코 적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언의 익주 정권 자체가 반발하는 토착 호족들은 숙청하고, 일부는 회유하는 동시에 외부의 세력인 동주인들을 끌어들이면서 성장했으므로, 이를 갑자기 물려받은 유장 대에 그 불만들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손책의 세력을 물려받은 손권과도 흡사하다. 다음으로, 익주가 안정된 것이 유장의 능력에 기인하는가를 따져야한다. 예컨대 동화가 성도령이 되자 풍속이 바뀌고 선한 방향으로 변했는데 현의 호족들은 동화의 엄한 법을 싫어했으므로 동부도위로 전임시키려 했다. 이를 유장이 막긴 했지만 동화에게만 맡기지 말고 유장 스스로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유장통치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빠진 정령을 완비해 확실하게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십이 없었으니 장송과 법정이 한탄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통치를 잘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통치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넓은 지역을 결속시킬 능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안타까운 케이스다. 통치력의 부재 문제로 유장 통치하의 익주는 유비가 공격하지 않던 시절에도 [[유언(삼국지)|유언]] 시절 부하였던 무장들이 모반을 일으켰었다. 거기다 고질적으로 동주병이 익주 백성들을 토색질하고 행패부리나 유장이 이를 제대로 못 다스리는 것에 대한 불만도 컸다. 또한 제갈량전에 제갈량이 익주의 선비들은 명군 얻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유장은 나약하고 의심이 많아 대신을 믿지 않자 왕상은 이를 간하는 글을 바쳐 유장이 깨달아 이에 응했다'는 배송지가 허정전에 주석을 단 익주기구전의 구절도 유장의 인사정책에 불만을 가진 익주의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유비를 만날 때 황권, 유파, 왕루가 결사 반대했음에도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본 것이나 법정이나 장송이 유장을 버릴 생각을 한 것 역시 모두 이에 관계된 일이다. 유장은 믿어야할 사람을 안 믿고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는 등 리더십과 인재관은 문제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국은 익주정벌 이후 유비의 카리스마로 신속하게 봉합되었으나[* [[유엽]]이 촉을 치려던 [[조조]]에게 일주일만에 유비가 익주를 장악 성공했으니 칠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비의 부재 때면(한중 정벌, 유비 사망 직후) 반란으로 조금씩 터져나왔고[* 유장과 유비의 후계자 [[유선(삼국지)|유선]]의 차이가 여기서 나오는데 유장은 자신을 도와준 방희와도 불화하며 분란을 일으켜 내분을 자초한 반면 유선은 어린 나이에 유비와 제갈량의 동시 부재 상태에서도 [[양홍]]의 진언을 받아 [[황원]]의 난을 자신의 근위병으로 토벌하는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후일 유선이 완전 얼간이 오브 얼간이가 되어서 그렇지 실상 사람 믿고 일을 맡기는 군주로서의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는 유장이 유선을 따라가질 못했던 셈. 사실 유선은 [[촉한사상]]으로 대변되는 명재상들을 성공적으로 기용한 것도 그렇고 말년 5년 정도만 빼면 꽤 선방한 쪽에 속한다.] [[제갈량]]에 의해 반란들이 완전히 진압된다. 유장을 공격한 것은 신의를 저버린 일이라 하여 유비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며 유비측 스스로도 유장을 공격한 것 자체는 도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하였다.[* 아예 유비는 직접 유장을 배신하는 건을 두고 조조를 예시로 들어서 '''조조 같은 짓'''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비록 유장이 무능했다고는 하나, 신의를 저버린 것이라 유비 스스로도 항상 조조와 반대로 해왔는데, 이번에 조조 같은 짓을 한다고 여긴 것.] 유비가 배신한 건 분명한 것이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역사가)|진수]]조차 "'''유장은 영웅으로서 자질이 없는데도 난세에 땅을 차지했으니, 분에 넘치는 자리에서 재앙을 자초한 건[* 부승치구(負乘致寇)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짐을 등에 지고 수레에 타니 도둑이 온다는 의미. 즉, 수레를 타는 고귀한 신분이 소인처럼 등짐이나 지니 저건 분명 훔친 재물이겠거니해서 도적이 이를 빼앗으려 한다는 뜻이다. 능력 없는 사람이나 [[소인배]]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재앙을 자초한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이치일뿐 이를 빼앗긴 것을 불행이라 할 수 없다.'''"(璋才非人雄 而據土亂世 負乘致寇 自然之理 其見奪取 非不幸也. -정사 삼국지 촉서 유장전)고 가차없이 비판했을 정도. 다른 이들의 논평도 비슷하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이 논하길 유장은 요해처를 막고 힘을 길러, 경계를 지키다 먼저 도모해, 오히려 세시(歲時)와 더불어 일이나 경우에 따라 일이 변해가는 걸 할 수 있었는데 급히 이기(利器)를 보내고, 조용히 귀양가며 내쫓김을 당했으니, 소위 본질은 양인데 거죽은 호랑이었던 격으로, 승냥이를 보고 두려워, 호소했다고 했고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가 기리길 유장의 재주는 영웅이 아닌데, 난세에 땅을 웅거하다, 탈취당해서, 진수는 불행이 아니라고 여겼고 유장, 조공이 법정, 장송을 업신여김을 보니, 두 한을 품은 사람이 불리고 나서, 함께 원망하며 서로 도와, 혹 국가가 멸망하거나, 천하가 삼분됐다고 했다. 물론 유장이 진 게 당연한 이치일 뿐이지 유비가 유장을 친 게 잘한 일이라는 말은 아니며, 주석을 단 사람들 중에선 유비가 그 뒤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좋아했다며 유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송지]]도 그 중 1명이다. 다만 오나라가 유장으로 흔들어보려고 했었는데 쥐뿔도 영향이 없었다거나, 위나라도 유비의 흠집인 유장 건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거나, 백성들 사이에서 유장에 대한 동정론도 찾아보기 힘든 걸 보면 유장이 익주에서 쉽게 잊혀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밌는 점은 당대 기준으로 누구도 이걸 비판하지 않았고, 후대 기준에서 비판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