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장(삼국지) (문단 편집) === 긍정적인 평가 === 낙성을 빼앗긴 후 유비군이 성도 코앞까지 다다르자 종사 [[정도#s-3|정탁]]이 "유비는 병사는 많지만 치중(군수물자)은 부족하니, [[청야 전술|백성을 모두 이주시킨 후 창고와 들판의 논밭을 모두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풀어 수성에 전념하면]] 유비는 물러갈 것이다."라는 (유비가 들었으면 가슴이 철렁했을)[* 실제로 법정에게 이 얘기를 듣고는 분노했다. 하지만 법정은 유장이 그렇게 할 리 없다고 했다.] 계책을 내놓았지만, 유장은 "적을 막아 백성을 평안케 한다는 말은 있어도 거꾸로 백성을 내몰아 적에 대비한다는 말은 없었다." 라면서 퇴짜를 놓았다. 나약한 성격도 있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는 온화한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유장의 주본거지였던 성도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인의를 내세운다곤 해도 빠르게 항복하는 것에 비하면 지리멸렬하게 항전했을 때 후일 대우가 더 안 좋을게 뻔함에도 끝까지 항전을 유장에게 권하였으며 유장이 항복하자 성도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하니 확실히 성도에서는 유장에게 인심이 동정적이었던 듯 싶다. 통치 후반기 유장은 자신이 있는 성도와 촉군에 대해선 안정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위의 반란 때 호응해서 같이 들고 일어난 곳이 촉군이었는데 유장을 잘 보좌했던 유장의 브레인 [[왕상(후한)|왕상]]이 촉군태수가 된 이후에 시종일관 그 정치에 대해 칭찬 일색이기 때문이다. 즉 사건의 선후순서를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인데, 왕상이 211년까지 10년간 통치했고(즉 201년-211년) 유비의 공격이 212년이므로. 유장에 대한 직접적인 쿠데타 시도인 조위의 반란은 201년 이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촉군과 성도는 201년부터 212년까지 장로를 제외한다면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화양국지에 조위의 반란은 200년부터 201년까지였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즉 194년부터 201년까지의 전개는 유장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궈놓은 세력을 갑자기 승계함으로써 발생한 불안정이었다면 201년부터 212년까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백성들에 대한 마음만은 높아 호족들이 [[동화(삼국지)|동화]]를 미워해 임지를 옮겨달라고 요구했을 때, 백성 수천 명은 유임시켜줄 것을 애걸하니 유장은 백성들의 청을 들어 2년을 더 머물게 해주고 이후 태수로 승진시켰다. 유장의 통치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했어도 적어도 촉의 부유함을 유지할 수준은 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일단 익주가 부유하다 평해짐은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동화전>에서는 사람들이 사치했다는 정도의 서술로만 그치고 있고 또한 <허정전>의 주석인 <익부기구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왕상은 유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익주는 풍요로우며 선비들은 아름답다고 평하고 있다. 이런 인재들을 고루 기용하지 못하고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기에 사가의 악평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인재의 문제지 자신의 통치력이 미친 촉군 내에서는 백성들의 안정을 보장했다도 봐야 할 것이다. 또 동화가 익주 태수로 승진했는데, 일을 잘 했다는 것으로 봐서 남방에 대한 지배력은 역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장이 기용한 동화와 왕상이 성도령, 촉군태수로 일을 아주 잘한건 확인되고 [[동화(삼국지)|동화]]는 그 [[제갈량]]조차도 뛰어난 인재라고 칭송했기 때문에 인재를 아예 못 쓴 건 아니라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다만 사실 '유장은 나약하고 의심이 많아 대신을 믿지 않자 왕상은 이를 간하는 글을 바쳐 유장이 깨달아 이에 응했다'는 기록을 보면 왕상의 보좌가 유장의 후반기 통치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했던것만은 사실인듯. 그래서 유장 치세의 익주는 백성들의 이탈을 불러올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은 아니었으며 다만 (유비와 비교해본다면) 효율적인 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선주전에서는 황권, [[이엄]]은 유장이 임용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으며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었다고 기록해 놓았으니 유장이 암약하기는 했어도 능력있는 자를 아예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장번이 이르길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나 좋은 말을 지켰으니, 이는 또한 [[송양공]], [[서언왕]]의 무리로, 무도한 군주가 되지는 않았다.' 라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