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자명 (문단 편집) === 해방 후 경력 === 1945년 [[8.15 광복]]이 찾아왔지만, 그는 귀국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푸젠성에 있어서 별도로 귀국 노선을 찾지 못했고 국민정부가 농업 분야에서 매우 유능한 인재인 그를 한국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득불 동지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1946년부터 1950년 6월까지 대만성 농림처 기술실주임, 합작농장관리소 주임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만의 농업개혁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농업건설과 합작농장의 사명>, <합작농장과 농업합작의 여러가지 형식>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조국이 그리웠던 그는 1950년 1월 정화암과 함께 귀국 신청을 했고, 반년 후에야 비자를 발급받고 대만을 떠났다. 그러나 유자명은 비자를 발급받은 후에도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대만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홍콩 등 각지를 전전하다가 후난성 부성장으로 있던 청싱링의 도움으로 창사로 가서 호남농학원 교수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농학자로서 활동했고, 1972년 농학부와 원예학부 교수들과 함께 창사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에서 출토한 벼의 종자를 고증하는 한편, 중국 벼 재배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분석했다. 유자명은 또 1964년에 <중국의 장미와 세계의 장미>를 발표해 중국 장미의 유럽 전파, 중국 장미와 유럽 장미의 교잡 과정 등에 대해 논술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남방은 포도를 재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고자 노력했고, 몇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남방에서 재배되는 포도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재배한 포도는 베이징박람회에서 호평을 받고 우수한 품종으로 뽑혔으며, 이후 중국 남방의 여러 지역에 포도가 보급되었다. 특히 후난성 지역에서는 대단위 재배를 시작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농학자 및 원예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커졌다. 유자명은 1977년 10월 심극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3·1운동 그 해에 나라를 떠나서 이젠 60년이 됩니다. 집이 남조선에 있기에 줄곧 고향에 편지를 못해 봅니다. 만일에 남북이 민족 대단결 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 1983년 2월 25일 유자명의 90세 생일날 호남농학원에서 성대한 축하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엔 후난성 인민정부 부성장, 제5기 인민대의원, 호남성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이 참석했다. 특히 유자명의 절친한 벗인 청싱링은 유자명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유자명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은 영원토록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때 중국 중앙국제방송국에서 그의 생일잔치 소식을 뉴스로 방송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후손들이 중앙국제방송국에 그의 연락처를 문의했다. 유자명의 딸 유득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자명은 안절부절하며 한국에 가야겠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1985년 4월 17일 창사시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92세.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귀한 대접을 받는 유자명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다가 그가 죽고 6년 후인 1991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문화 류씨]][[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의열단/단원]][[분류:1894년 출생]][[분류:198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