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광복 이후의 삶 === 광복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서 비어있던[* 공산군에게 미국 회사로 오인받아 몰수당할까봐, 부득이하게 유일한의 재가를 받지 않고 임시로 임원진을 바꾸고 급히 피난을 갔다.] 유한양행은 물론 온 국토가 쑥밭이 되자, 이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은 철저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받아 대기업이 되었다.[* 다만 이후 정주영은 국회 청문회에서 군부 세력에 눈감고 시류에 순응해 바른 소리 못하던 자신의 과거에 죄송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또 딱히 이익을 노리고 자금을 줬다기보단 괜한 위해를 당할까 그게 가장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실제 유일한 회장이 그 괘씸죄에 걸려 이 사단이 난 것. 물론 유일한처럼 깨끗하면 태클걸고 싶어도 걸게 없긴 하다만.][* 참고로, 현대와 유한쪽은 일종의 사돈 관계기도 하다. [[현정은]]의 언니가 유일한의 조카 며느리인 것. 즉, [[유특한]]의 며느리가 현정은의 언니. 거기에 이들 자매는 [[김무성]]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들 자매 모친이 김무성의 누나 [[김문희]].]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 세무조사나 감사 등을 경험해 본 이라면 알겠지만, 몸담고 있는 조직이 떳떳한가를 떠나서 세무조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실상 그 날의 업무가 마비되는 매우 피곤한 일이다. 성향을 막론하고 경기가 안 좋을 시 정부가 정기 세무조사를 유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세금 떼먹어도 봐준다는 게 아니라 저런 업무 마비를 피하게 해주겠다는 의도. 이 때문에 기업인에 대한 유서깊은 정치보복 수단이기도 했다.] 당시 세무조사원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김만태 당시 유한양행 세무감찰팀장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20일 정도 조사를 하니까, 무슨 한국에 이런 업체가 있나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정치자금을 거절한 일종의 괘씸죄로 시범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은 셈이니 이건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다.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포탈]] 혐의를 낙인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기업을 누명을 씌웠다는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유한양행을 적산으로 간주해 세금 압박을 가했다. 이승만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의 후원자가 [[박용만(1881)|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일한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와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한 바 있는데 이때 참여한 이가 바로 유일한 외에 [[이승만]]과 [[서재필]]이다. 이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외교독립론에 입각해 있었는데 유일한은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해 유일한은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유일한은 자주독립의 주체가 한민족이 되고 그 곁가지로 다른 나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외교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고 서재필과는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서재필이 유한양행의 로고를 만들어준 것도 그와 친분이 있고 서로 소통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그의 외교론이 독립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한인들과 독립운동가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유일한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면서도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경계한 것인데 이승만이 유일한을 정적으로 간주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나갔다는 평이다.[* 유일한은 이승만의 외교론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6.25 전쟁]]에 대한 연합군의 파병과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굽히고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승만 자신이 정치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지도 않는 중도 성향인데다 유일한은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였다. 물론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어서 미국에 굽신거리는 외교정책을 펼친 적은 없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손녀 유일링의 학비 1만 달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고 묘소 주위의 5천 평은 학생들이 놀도록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아들은 자립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535819710312m10217&set_date=19710312&page_no=2|#]]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82320|#]]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서거 소식 기사. 중앙일보에 의하면 1968년 4월에 민간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컴퓨터(IBM1401)를 도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유일한과 호미리 부부는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올리버 R. 에이비슨]] 박사에게 각각 연전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소아과 과장을 제의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 다만 유일선도 상당히 도덕적인 인물인데, 아래에 나온 일화 말고도 [[전경련]]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가 벌어졌다. 유일한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공공의 이익, 국민건강, 나라를 위해 때로는 모험을,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살아온 유일한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 前 [[유한양행]] 회장, 現 보건장학회 이사장 최근 헌정 기업인으로 추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09&aid=0004106478|#]]]와 대화에서 유일한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2020년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시작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하기 때문에 퇴사하여 이후 2021년에는 조욱제 대표가 취임하였다. 현재 조욱제 대표도 1987년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지금의 총괄관리 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지금의 대표로 취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