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CIA의 전신인 OSS(미육군 전략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프로젝트|냅코 작전]][* 재미한인들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지하조직화하려던 작전이었다.]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냅코 프로젝트)]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하지만 국내침투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냅코 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81000209106001&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8-10&officeId=00020&pageNo=6&printNo=22253&publishType=00010|참고자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