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상세 == [youtube(m3iT6JyQZ00)] [youtube(79ONg73H5iw)] 한국에서 모범적인 기업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 한반도에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1910년대 후반으로 보이므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885|1]][[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4_0060_0010_0010|2]]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다.]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다.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하고 후생복지시설을 세우는[* 1930년대 부천 소사공장이 건립될 때 부지에 독신자 사택, 상하수도 시설, 집회소, 운동장, 화원, 동물 사육장, 양어장, 회의소, 수영장 등을 마련해 주었다고.] 등 회사의 임직원에게도 복지를 챙겨주었다. 또한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힘써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냅코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재미한인사회에서 여러 활동을 했다. 일찍이 식민지 시기에 만주, 중국, 대만, 일본 등 해외 시장까지 진출했으며 [[광복]] 후에도 계속 기업을 운영하면서 윤리 경영과 모범 납세, 국익 우선, 정경유착 사절을 원칙으로 삼았고, 전쟁을 거친 기업을 재건하는 수고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기 정치자금 미납에 대한 보복조치로 세무 조사를 받았으나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아서 박정희로부터는 되려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산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하거나 보건장학회,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공익재단에 여러 차례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말년에 회사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일임했으며,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했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가족 경영,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이름값|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위인(偉人)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이병철]]이나 [[정주영]]조차도 자신은 '부유한 노동자'라고 자칭했으면서도 [[https://wspaper.org/article/143|이런 비판]]을 심심치 않게 받으며 국민 대다수는 존경과 불신을 동시에 보낸다. 가족 경영이야 [[함태호]]도 포기하지 못한 일이고. 물론 전문경영인 제도 자체는 실패 사례가 적잖다.]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석사,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사실상 누구든 대학교까지 수료해야만 사회에서 찬밥 신세를 면하는 현재와 달리 중등, 고등교육기관도 입학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박정희 초중반기의 한국인으로서는 더더욱 희귀한 고학력자에 속하는 셈이다. [[이승만]]도 비슷한 사례이며, 더군다나 그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대통령보다도 박사라고 많이 불렸다.] 말년에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자주 불리는 호칭이 '유일한 박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