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유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06472_161086_5118.jpg|width=100%]]}}} || || 1946년경 유일한의 가족들. 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만 제외하고[* 이후에도 나와 있듯, 유일링의 아버지 유일선(유일링이 당시 미성년이었으므로 그 돈의 실질적인 상속자는 유일선이었다.)은 그 등록금조차 받지 않으려고 했다가 결국 받았으나 반만 쓰고 남은 액수는 다시 사회에 환원했다. 퇴직금 많다고 반환 소송 건 동생도 아들도 좋은 것만 본받았다.]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이다. 대기업 회장 재산이 뭐가 이리 적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71년 시점에서 407억 원'''이다.[* 1910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형제가 정리한 재산이 40만 원이고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이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산 값이 만 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언젠가는 억대나 조대 원도 헐값 되는 날이...--] 2021년 기준 ''' 7,9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시간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고 8천억이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이다. 로또 1등 당첨금이 약 30억원 대인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집을 사는데 쓰거나 큰 지출이 있지 않은 이상 어지간하면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당장 100억만 있어도 1년에 1억씩 쓰면 100년이 걸리는데 8000억원이라는 돈은 말 그대로 '''몇 대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어도 남는 돈이다.''' 이를 다 사회에 헌납한 셈.[[https://www.youtube.com/watch?v=OR_MJUTlI44|지식채널 e]].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쌀]] 40kg가 2,880원(한 가마에 8,000원)이었다. 라면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분식집]]에서 30원, [[슈퍼]]에서 개당 18~20원이었다.[[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3191037061001|참고자료]] [[http://k.daum.net/qna/view.html?qid=4mB1I|#]]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상승이 있었으니 4조가 넘는 금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딸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유재라의 묘소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손녀 일링 유는 미국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무급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