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익배 (문단 편집) == 생애 == 1921년 9월 9일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적둔리 16번지(現 [[황해남도]] [[은천군]]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니혼대학]] 문과 2학년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해 [[중국]] 전선에 끌려갔다. 그 뒤 1942년 4월 탈영해 [[한국광복군]] 제2지대 지하공작원이자 [[난징시|남경시]] 지구 특파원으로 활동 중이던 [[조일문]][* 전 건국대 총장이자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을 만나 그의 권유로 지하항일공작에 투입되었다. 이후 1943년 한국광복군에 정식으로 입대했고, 제2지대 공작원으로서 남경시와 [[절강성]] 등지에서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 기습공격하는 등의 항일공작활동 및 유격전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6월에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9|김해일]](金海一) 등과 함께 제3전구 유격진구에서 공작 중이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74|박승학]](朴承鶴)을 방문하던 중 [[안휘성]] 적계현(績溪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쉬안청시]] 지시현(績溪縣).] 부근에서 일본 제국 육군에 포위당했으나 유격부대와 화력으로 대항하며 가까스로 포위망을 탈출해 전원 안휘성 흡현(歙縣) 휘주(徽州)지역[* 現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황산시]] 후이저우구(徽州區).]으로 집결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신익희]] 휘하에 있으면서 우익운동과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유익배는 일찍부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 산하에 정치공작대[* [[백의사]] 소속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신설을 기획해 신익희에게 제안했으며, 1945년 12월 정치공작대 중앙요원으로서 안병성(安秉星)·[[정희섭]][* 광복군 제3지대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제3공화국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 역임.]과 함께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에 잠입하였다. 이때 유익배 등은 [[조만식]]을 만나 월남을 촉구했으나 "내가 월남하면 북조선 동포들은 누굴 의지하며 산단 말인가"란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남한으로 되돌아왔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익희와 유익배.png|width=100%]]}}} || 1946년 3월 [[전진한]] 등과 함께 [[대한노동총연맹|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 이후 [[대한노동총연맹]]으로 개칭되었다.] 설립에 참여하였고 이때부터 좌익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대립하였다. 또한 대한혁신청년회 및 서북청년회의 고위 간부들과 혈맹관계를 이루며 우익 정치인으로서의 활동도 이어 나갔다. 당시 서북청년회에서는 월남한 청년회원들을 여러 기업체에 소개해 [[노동조합]] 간부로 자리잡게 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는데, 당시 대한노동총연맹 조직부장으로 있던 유익배는 그들의 경력을 살펴보고 [[일제강점기]] 때 경찰이나 밀정으로 일한 자들이라면 기업체에서 노동조합 간부로 채용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이유인 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이 기업체에 친일 경력자들을 적극적으로 주선해준다는 식으로 일종의 [[흑색선전]] 자료로 삼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부 서북청년회 하부조직원들은 유익배의 이와 같은 정치적 고려를 헤아리지 못하고 "유익배 부장이 일부러 우리의 취업길을 막는다"라며 속칭 [[빨갱이]]로 몰아 그를 납치해 폭행하는 등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1224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12-24&officeId=00032&pageNo=9&printNo=12692&publishType=00020|이른 바 린치를 가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 중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이나 밀정을 하던 자들의 노조간부 취업을 막다가 속칭 빨갱이로 몰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1224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12-24&officeId=00032&pageNo=9&printNo=12692&publishType=00020|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서북청년단 간부들이 린치를 가한 청년들에게 '이 분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꾸짖어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좌익 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흑색선전]]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른 광복군 출신 청년들이 [[조선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활동에 집중된 반면 대한노동총연맹 활동에 참여해 1947년 3월 17일 제1회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국제정세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70318002391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03-18&officeId=00023&pageNo=2&printNo=7306&publishType=00010|보고했으며]], 1948년 1월 23일 조직부장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8012300239102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1-23&officeId=00023&pageNo=2&printNo=7575&publishType=00010|선임되었다]]. 이후 청년부장에 선임되었다가 1950년 3월 30일 다시 조직부장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033000239102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3-30&officeId=00023&pageNo=2&printNo=8290&publishType=00010|선임되었다]]. 그 뒤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에서 한국시찰단을 파견하기로 하자, 대한노동총연맹에서는 4월 8일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조사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0409002091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4-09&officeId=00020&pageNo=2&printNo=8229&publishType=00010|선임되었다]]. 1956년 9월 30일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 중앙상무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6100200239201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10558&publishType=00020|선출되었고]], 연이어 1957년 10월 21일에도 중앙상무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7102200329101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10-22&officeId=00032&pageNo=1&printNo=3770&publishType=00010|재선출되었다]]. 1959년 3월 개최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결성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에 [[http://metall.or.kr/history/178581|선출되었다]]. 1963년 2월 14일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21400329202038&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2-14&officeId=00032&pageNo=2&printNo=5323&publishType=00020|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81400239102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3-08-14&officeId=00023&pageNo=2&printNo=13010&publishType=00010|수여받았다]]. 1966년 11월 19일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61119002391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6-11-19&officeId=00023&pageNo=2&printNo=14024&publishType=00010|임명되었고]], 1969년 9월 27일에는 앞서 [[대한조선공사]](당시 사장 [[남궁련]])의 노사분쟁수습에 있어서 정부의 긴급조정권에 의한 직권조정이 실패하자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으로서 직권중재위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9092900099203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9-09-29&officeId=00009&pageNo=3&printNo=1092&publishType=00020|선임되기도 했다]]. 1977년 11월 30일에는 건국포장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7113000329206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1-30&officeId=00032&pageNo=6&printNo=9900&publishType=00020|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했다. 이후에도 노동운동 및 개인사업에 종사하다가 2007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 212실 131호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