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응룡 (문단 편집) === 가사도와의 갈등 === 정대전이 몰락한 이후 남송의 재상이 된 [[가사도]]는 오잠을 미워했다. 당시 수도의 쌀값이 귀해지자 유응룡은 《권조가(勸糶歌)》를 지었는데, 한 환관이 유응룡의 《권조가》를 가지고 이종에게 보여주니 이종은 유응룡이 지은 것임을 묻고 가사도에게 쌀값이 높으니 마땅히 신속히 처리하도록 알렸다. 가사도는 쌀값이 높은 원인을 알고 유응룡에게 분노했다. 유응룡은 사농소경(司農少卿)으로 전임되었다가 이윽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손부봉(孫附鳳)의 탄핵으로 결국 수도를 떠났다. 1262년, 호남(湖南)에 기근이 일어나자 유응룡은 제거상평창(提擧常平倉)으로 기용되었고 흉년을 구제한 공으로 직보장각(直寶章閣)·광남동로전운판관(廣南東路轉運判官)으로 옮겼다. 또한 비서감(秘書監)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을 역임했고, 지융흥부(知隆興府) 겸 강서전운부사(江西轉運副使)를 맡으며 화적(和糴)으로 사들인 식량 20만 석을 면제하도록 상주하였으며, 임시로 호부시랑(戶部侍郞)을 맡으며 시강(侍講)을 겸임하였다. 가사도가 재상이 된 이후 황제가 낸 문제에 답변할 때 조금이라도 강직한 면을 드러낸 신하들이 쫓겨나자 유응룡은 이런 상황에 대해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이 오늘의 일을 보니 해야할 말이 많습니다. 근일 이래로 공손하고 엄숙하며 절조를 굳게 지키는 이들은 사안을 논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사안을 지적하여 개진하고 조금이라도 절박한 이들은 연이어 조정을 떠나는데, 어찌 양성(兩省)에서 지나치게 반박하여 의심을 키웁니까? 어찌 신하가 문제에 답변할 때 황제의 뜻을 어겨 신하의 두려움을 재촉합니까? 조정이 청명했을 때 간관들은 이미 의심과 두려움을 품었는데, 소신은 정직한 신하들이 압도되고 강직한 신하들이 혀를 차서 정말로 성세가 아니게 될까 두렵습니다. 결국 유응룡의 발언에 시종관과 양성의 관원들을 비롯한 이들이 분하여 이를 갈았다. 얼마 안 있어 유응룡은 집영전수찬(集英殿修撰)의 신분으로 지건녕부(知建寧府)를 맡았으나 갑자기 사양했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노월(盧鉞)이 가사도에게 아첨해서 결국 물러났다. 뒤에 강동전운사(江東轉運使)로 기용되었으나 이마저도 그만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