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우(삼국지) (문단 편집) == [[후한서]] 유우전 번역본 == || 이하의 내용은 범엽이 지은 [[후한서]]의 '''유우전''' 기록을 번역해 옮긴 것입니다. || || 기존 번역과 문체가 다릅니다만, 내용상에서 빠뜨리거나 상충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 자는 백안이며 서주 동해군 담현 [[사람]]이다. 조부 유가는 광록훈을 지냈다. 처음에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각지의 관직을 연임하던 끝에 유주자사가 되었다. 백성들에게 어진 정책을 펴고 백성과 변방의 이민족마저 그 덕에 감동했다고 하며, 본래 [[한나라#s-1.2|한]]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던 [[선비(민족)|선비]], 오환, [[부여]], 예맥등의 무리들마저 모두 (그를 따라) [[조공#s-1]]을 바쳤다. 변방에서는 감히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없었고, 백성들은 그의 어진 통치를 기뻐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중평 초년 임기가 차 관직을 기주의 감릉상으로 옮겼는데, 그 당시 기주의 모든 군현은 [[황건적의 난]]으로 공격당해 격파되어 있었다. 이에 유우는 스스로 푸성귀 같은 거친 음식을 먹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아랫사람들을 다스리고 피폐해진 영지를 평안히 어루만졌다고 한다. [[동탁]]의 정권 장악 후에는 동탁도 그의 인망을 알았기에 (숙청당한 [[원외(삼국지)|원외]] 대신) 그를 태위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 무렵에는 혼란해진 도로 사정으로 인해 왕명이 닿지 않았다. 당초에 조서를 내려 [[공손찬]]으로 하여금 [[오환]]을 정벌하게 하고 그 상관으로 유우를 두었으나, 공손찬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치중해 그의 병사들을 방종하게 풀어두고 심하게 백성들을 약탈했다. 이에 반해 유우는 인애로 다스렸으며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백성들의 재물을 이롭게 했다.[* 유주의 곡물 가격이 한 석에 30전밖에 안될 만큼 물가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동탁의 화폐 개혁 삽질로 낙양과 장안에서 곡물 한 석 값이 수만 전까지 오른 것과 대조된다.] 이때부터 유우는 공손찬과 급격히 대립하게 된다. 191년. [[한복(삼국지)|한복]]과 [[원소(삼국지)|원소]], 하북의 여러 제장들이 모여 유우를 [[천자]]로 세울 것을 논의한다. 그만큼 황족인 유우에게는 정통성과 명분, 또한 그 외에도 백성의 지지를 받을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혈통도 헌제와 13촌이면 그렇게 황통에서 먼 편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유비같이 무늬만 황족인 사람에 비하면 가깝다는 거지 광무제의 아들대, 즉 백년도 더 전에 갈라져 나온 방계이고, 13촌 정도면 그냥 남이다. 물론 그래도 유비처럼 전한까지 올라가야 황실과 닿아있는 것도 아니고 후한 황실과 직접 닿아있는 확실한 황족이긴 하다. 여담으로 삼국지연의가 창작한 유비의 별칭인 "유황숙"은 사실 유우에게 딱 맞는 설정과 호칭이다. 먼 친척이기지만 황족이긴 하고, 헌제의 아저씨뻘 향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광무제의 후손인, 동한계 황족이였다. 후에 황제가 되는 유비가 서한계 황족이였던거에 비하면 우위인 셈. 원소 등은 낙랑태수 [[장기(낙랑태수)|장기]] 등을 보내 유우에게 천자의 존호를 올렸지만, 유우는 그들을 만나자 정색하며 '''"힘을 합쳐 왕실에 마음을 다해야 하거늘 어찌 역모를 꾀하여 서로를 더럽히는가"'''라고 말하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오서에 따르면 한복이 원술에게 서신을 보내 지금 황제는 [[한영제|효영제]]의 자식이 아니니 강후 [[주발]]과 [[관영]]이 어린 임금을 주벌하여 폐립하고 대왕[* 代王, 즉 [[한문제|전한 문제]]다.]을 맞아 옹립한 고사를 따르고자 한다 하며, 유우의 공덕, 치행[* 治行, 정치의 행실, 실적이다.]이 화하(華夏,중국)에서 견줄 이가 없고 지금 공실의 방계친척이니 그 누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했다. 또한 말하기를, "옛날 [[광무제]]가 전한 때 정왕(定王, 유발劉發)의 5대 손으로 대사마로 하북을 거느리다 경감, [[풍이]]가 존호에 오르도록 권하니 마침내 [[경시제]]를 대신하였습니다. 지금 유공[* 劉公, 유우를 말한다.] 자신이 공왕(恭王)의 지별(枝別)이고 그 대수가 또한 다섯이며[* 유우가 공왕의 5대손이라는 말이다.] 대사마로써 유주목을 겸하니 이는 광무제와 같은 점입니다."라고 했다. 당시 네 별이 기미(箕尾) 자리에서 모이자 한복이 도참서를 칭탁하며 말하길 신인(神人)이 장차 연(燕) 땅의 분야에서 나타날 것이라 했다. 또한 제음(濟陰)의 남자 왕정(王定)이 옥인[* 玉印, 옥도장이다.]을 얻었는데 그곳에 '우(虞)가 천자가 된다.'(虞爲天子)는 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여러 징조의 해석을 후세 학자들이 해석한 것이 삼국지집해에 남아 있는데 청나라의 하작은 네 개의 별이 기미 자리에서 모인 것은 소열제 [[유비]]가 탁군에서 일어난다는 징조이고 '우(虞)가 천자가 된다'는 것은 위(魏)나라가 우[* 虞, 순임금이다.]의 후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일청은 당시 위나라가 순임금의 후예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의문[* 義門, 하작의 호다.]이 이렇게 말했다고 쓰며 장제전에 보인다고 했다. 즉, 하작의 해석에 의하면 두 가지 사건은 유우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각각 유비와 [[조비]]가 황제가 될 조짐이라는 말이다. 뒤의 우위천자(虞爲天子)에서 우(虞)는 유우가 아니라 순임금의 후예, 즉 조비라는 말인데, [[장제(조위 태위)|장제]]전에 의하면 위 명제 [[조예]] 때 [[고당륭]]이 교사를 지내는 일에 관해 논하면서 조씨를 순임금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장제가 이를 반박하는데 결국 고당륭의 주장에 따라 위나라는 공식적으로 순임금의 후예임을 표방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후 한복 등이 다시 유우에게 영상서사가 되어 천자 대신 관직의 임명을 맡아주도록 청하였으나 거듭 들어주지 않았다. 유우는 또한 연(掾)인 우북평 사람 [[전주(삼국지)|전주]]와 종사 선우은을 사잇길로 보내 장안에 알현케 했다. 이전부터 [[헌제]]는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전주 등을 보자 크게 기뻐했다. 이때 유우의 [[아들]] [[유화(삼국지)|유화]]가 황제의 시중에 있었으므로 유화를 몰래 보내 무관(武關)을 벗어나 알리고, 유우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도록 했는데, 남양에 이르렀을때 후장군 [[원술]]이 이를 듣고 유화를 붙잡고는 [[사신#s-1.1]]을 보내 유우에게 알리고 유우가 병사를 보내면 같이 서쪽으로 가 천자를 맞이하자고 했다. 이에 유우가 유화에게 수천의 [[기병]]을 보내주고 천자를 맞이하도록 했다. 그러나 원술은 이들을 파견하지 않았다. 본디 공손찬은 원술의 속임수를 알았으므로 유우가 군사를 보내는 것을 멈추게 했으나 유우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손찬이 은밀히 원술에게 권하여 유화를 억류하고 그의 기병을 빼앗도록 했다. 유우는 이로부터 공손찬과의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유화는 노력 끝에 원술에게서 달아나 북쪽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거듭 원소에게 잡혀 그의 영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공손찬은 이미 원소에게 여러차례 패배를 거듭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오히려 원소를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유우는 이렇듯 그가 군사의 강함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함을 재앙으로 여겼다. 또한 뜻을 얻어 그대로 본뜨지 못하게 하고(且慮得志不可複製),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의 녹봉을 줄였다.[* 유우는 공손찬의 상관이었다.] 공손찬은 이에 대노하여 유우의 절도를 매번 무시하고, 또한 백성들을 거듭 침범하였다. 유우는 호이(=이민족)들을 위로하여 상을 내렸는데, 이 때마다 공손찬은 유우가 내린 상을 약탈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마침내 유우는 더 이상 이를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이에 사신을 보내 상주하여 공손찬의 포악함과 약탈행위에 대한 죄를 아뢰었다. 공손찬 또한 상주하여 유우가 자신의 녹봉을 줄였다고 아뢰었다. 두 상주의 내용이 교차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고 헐뜯었다. 이에 공손찬은 계성 앞에 나란히 성을 쌓기 시작했다. 유우는 여러 차례 공손찬과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공손찬은 언제나 병이 났다고 칭하며 유우의 청에 불응하였다. 유우는 이에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그를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대해 우북평 사람인 동조연 [[위유]]와 상의하였다. 위유가 말하길, "지금 천하가 목을 빼어 공을 존경하며 따라 섬기고자 하니 모신과 조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공손찬의 문무와 재력(才力=능력)은 족히 믿을만하니 비록 작은 악(惡)이 있더라도 마땅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아야 합니다." '''유우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얼마 지나 위유가 죽었는데, 이제 유우의 분노는 오랫동안 쌓여왔으므로 더 이상 공손찬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초평 4년 겨울, 마침내 직접 모든 병사들을 인솔하여 주둔했는데 따르는 무리가 10만에 이르렀고 이로서 공손찬을 공격했다. [[군대]]가 움직이려는데, 종사인 유주 대군 사람 [[정서(후한)|정서]](程緖)가 [[갑옷]]을 벗고 유우 앞에 나아가 말했다. "비록 공손찬에게 지난 악행이 있으나 그 죄명으로 인해 그를 치는 것이 능히 정당하진 않습니다. 명공은 먼저 효사(황실?)에 고하여 그 행동(공손찬의 잘못)을 고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런데도 군사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국가]]에 이롭지 못한 일입니다. 승패를 더하여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병사를 머무르게 함만 못하니, (병사를 머무르게 해) 그 위용으로서 임하십시오. 공손찬은 반드시 회개하여 자신의 과오를 사죄할 것입니다. 이것이 싸우지 않고 능히 사람을 복종케 하는 것입니다." 유우는 정서가 일을 막으려고 책잡는 것이라 여겨 마침내 그를 베어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한 군사들에게 당부하여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며 단지 백규(伯珪=공손찬) 한 사람만 죽여야 할 뿐이오." 이때 주의 종사 [[공손기(후한)|공손기]]란 자가 있었는데, 공손찬은 성이 같다는 이유로 그를 후대하였다. 공손기는 유우의 계책을 알게 되자 밤중에 공손찬에게 가서 이를 고했다. 공손찬은 이때 부곡들이 모두 흩어져 밖으로 나가 있었으므로, 미처 대처할 방법이 없어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성의 동쪽 벽을 파고 달아나고자 했으나, 유우의 병사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백성들을 사랑하는 유우가 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영을 내려 [[불]]을 지르는 등의 소란행위를 금하여 급히 성을 애워싸지 못했다. 공손찬이 이를 보고 정예병 1백명을 뽑아 바람에 맞춰 불을 놓고 그대로 유우군을 향해 곧게 충돌했다. 유우가 마침내 대패하여 관속들과 함께 북으로 달아나 거용현으로 갔으나 공손찬이 이를 뒤쫓아 공격하여 3일만에 성을 함락시켰고 마침내 유우와 그 처를 나란히 사로잡아 계로 귀환했으나, 유우로 하여금 주의 문서를 관장하게 했다. 천자가 단훈을 사자로 보내 유우의 봉읍을 더하고 6주를 감독하게 했으며, 공손찬은 전장군으로 임명하고 역후(侯)에 봉했으며 가절을 내려 유주, 병주, 청주, 기주를 관할하게 했다. 이에 공손찬이 거짓으로 고하길, 유우가 이전에 [[원소(삼국지)|원소]] 등과 더불어 존호를 칭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며 단훈을 협박해 유우를 계의 저자에서 죽였다. 그는 유우를 죽이기에 앞서 방자하게 말하길, '''"유우가 [[천자]]로 내세워질 정도였다면 마땅히 하늘이 비바람으로써 그를 구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마침 이때는 [[가뭄]]이 불같이 성할 때였으므로 결국 유우는 참수당해 죽었다. 유우의 머리는 경사로 보내졌는데 유우를 따르던 관리들이 그 길을 뒤따라 유우의 머리를 빼앗고 장사지냈다. 유우는 두터운 은혜로서 무리를 얻었으며 북주를 두루 편안하게 다스렸으므로 백성들 중에는 통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