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엔 (문단 편집) === 냉전기의 유엔 === [[미국]]과 [[소련]]사이의 대치 상황 속에서 국제 평화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엔의 기본 임무가 [[세계평화]] 유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두 양 [[초강대국]]들의 대치 상황이 유엔의 기본 역할 자체를 마비시켰고, 또 세계평화의 당시 가장 큰 위협이었던 [[냉전]] 대치 상황엔 정작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냉전]]과는 상관없는 분쟁에만 개입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평소엔 [[냉전]] 대치 속에서 개입 자체를 허락하지 않다가 필요할 때만 개입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우가 있는데, [[소련]]과 [[북한]], [[중국]]이 [[대한민국]]을 기습침공하자 [[1950년]] 총회에서 [[미국]]을 위시한 유엔측이 급히 결성한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을 승인시킨 전례가 가장 대표적이다. 당시 [[소련]]이 총회에 불참하고, [[제2세계]]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이 상임이사국 지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6.25 전쟁]]을 위해 결의안을 가결한 것 외에, [[1947년]] 총회에서는 [[팔레스타인]]을 분할하여 [[이스라엘]] 국가 건국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당시 [[팔레스타인]]땅에 [[유대인]] 민족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제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고, 결국엔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유엔의 승인을 얻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1956년]]에는 [[제2차 중동전쟁]] 종전 직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완충을 위해 유엔긴급군(UNEF)를 파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순수히 양 [[강대국]]이 개입되지 않은 [[중동]] 국가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처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유엔은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것에 대해서는 [[유엔 평화유지군|평화유지군]] 파견은 고사하고, 중재를 위한 개입조차도 하지 못했다.[* [[1956년]] 당시 [[헝가리]]엔 [[헝가리 혁명|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는데, [[소련]]이 [[동유럽]]내에서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여 [[헝가리]]를 침공한 사건. 당연히 유엔은 [[소련]]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입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유엔은 [[1964년]]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을 매듭짓기 위하여 수십년 동안 [[콩고]]에서 [[유엔 평화유지군|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유엔의 노력 속에 당시 사무총장이던 다그 함마르셸드가 반란 중 반란군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 [[콩고]]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 [[콩고 내전]]을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노력을 전개한 그에게 사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961년]] 사무총장이 갑자기 사망하자, 급하게 후임자를 물색하여 [[우탄트]](U Thant)를 취임시켰다. 후에 [[콩고 내전]]은 [[우탄트]]가 지휘하는 유엔 작전에 의해 종식될 수 있었다. [[1964년]] [[우탄트]]는 [[키프로스]]에 군사적 위기가 발생하자 키프로스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배치했다.[* [[그리스]]에서 [[1964년]]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같은 인근 그리스계 국가인 [[키프로스]]와 군사적 긴장이 심화되었다.] [[우탄트]]의 임기 동안에 [[독립|탈식민지화]]가 전개됨에 따라,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1960년]] 한 해에만 무려 17개국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그 중 16개국은 기존 [[열강]]에서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이었다. [[1971년]] 10월 25일에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련]]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으로 [[제2세계]] 진영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으로 취임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륙에서 밀려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1949년]] 대륙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는 [[중화민국]]이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급부상으로 [[중화민국]]은 힘의 논리에 의해 기존의 지위에서 강제로 내려오게 된 것. 같은 [[미국]]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이 결의안이 통과되었던 것은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이 상당히 부상하고 있었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표결을 막을 수 있었던 [[중화민국]]이 표결 과정 자체에 불참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유엔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 감소로 해석되었다. 이 시기에 유엔은 극심한 [[냉전]] 대치 상황 속에서 수많은 중재 실패를 겪었다. 따라서 유엔은 기본 임무인 평화 유지를 넘어 두번째 목표로 [[개도국]] 경제 개발 지원과 문화 교류를 설정하였다. 실제로 냉전이 가장 극심했던 [[1970년]]대 말까지는 기본 임무를 위한 평화유지 예산보다, 사회 경제적 개발 및 문화 교류에 관련된 예산 규모가 훨씬 더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