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성구 (문단 편집) == 역사 == 기록상 최초로 표기된 이름은 [[백제]] [[대전광역시/역사#s-1|우술군]](현 [[대덕구]] [[회덕동(대덕구)|회덕동]] 일대)의 산하에 속한 '노사지현(奴斯只縣)' 혹은 '노질지현(奴叱只縣)'으로, 둘 다 동일한 [[순우리말]] 지명을 [[음차]] 표기한 것이다. [[고대 한국어]]에서 [[叱]](꾸짖을 질)이 'ㅅ', [[只]](다만 지)가 '기'의 음차자로 쓰였음을 감안한다면 실제 발음은 '놋기'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에는 전국 지명의 한화(漢化)가 추진되면서 '유성(儒城)'으로 개칭되었다.[* '놋기'는 '노+[[사이시옷|ㅅ]]+기'로 분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기'는 [[백제어]]로 [[성(건축)|성]]을 뜻했으므로 유성의 '성([[城]])'과 대응한다. 또한 [[儒]](선비 유)의 경우 [[상고한어]] 재구음이 '노'에 가까우므로 '노사지'의 '노(奴)'와 대응된다. 즉 유성(儒城)이라는 지명은 기존 [[고유어]] 명칭인 노사지(奴斯只)를 적절하게 음차, [[훈차]]하여 탄생한 결과인 것이다.] [[유성온천]]은 [[삼국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상술했듯 [[남북국시대]]에 유성으로 불리기 시작한 뒤 현재까지 그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유성현이 공주의 속현으로 있었으며, 지금의 유성구와는 영역에 차이가 있어 [[둔산동(대전)|둔산동]]과 [[은행동(대전)|은행동]]을 지나 대전의 남동쪽 끝까지 뻗어 있었다. 한편 유성현 북쪽에는 [[덕진동|덕진현]], 남서쪽에는 [[진잠동|진잠현]], 북동쪽에 회덕현이 있었으며, 조선 초에 진잠과 회덕만 별도의 고을로 독립되었고 유성과 덕진은 공주에 편입되었다. 구한말에는 옛 유성현과 덕진현의 상당수 지역이 회덕군으로 넘어갔다. 현 유성구 영역 중에는 북부 지역이 해당한다. 공주군에 잔류했던 지역은 1914년에 대전군 편입. 이후 현 유성구 영역은 [[대덕군]] 유성읍, 진잠면, 탄동면, 구즉면 4개 읍면이었다가, [[1983년]] 유성읍 전역 및 진잠·탄동·구즉면의 일부가 먼저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고, [[1988년]] 중구에서 서구가 분구되어 서구 관할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989년]] 다시 유성구가 분구되고 대덕군이 폐지되면서 진잠(남선리 제외)·탄동·구즉면의 전역을 편입하면서 현재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