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선(삼국지)/평가 (문단 편집) ==== 인선 문제에 대한 변호 ==== 이러한 인선 문제를 어느 정도 변호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첫째로 자기 정치를 해보고 싶은 회제의 권력 의지를 든다.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평생을 아버지 소열제와 제갈량이 마련해 둔 인맥풀의 한복판에 있다 보니 전제 군주로서 어느 정도 염증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냐는 [[https://m.fmkorea.com/index.php?document_srl=2555094876&cpage=1|이야기다.]] 즉, 본인 주도하에 자기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 개편을 하고 싶어하는 '물갈이' 욕구가 드는 건 당연지사이지 않겠냐는 시각이다. 이는 현대 권력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자가 바뀌면 흔히 일어나는 정치 스케줄이다. 이 때문에 진지와 황호를 총애하고 귀순한 하후패를 우대한 것은 본인 중심의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한 권력의지의 발로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진지는 회제가 발굴한 인물이 아니라 비의의 추천으로 임용된 인물이고 황호는 진지 사후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재에 가까웠다. 기존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동떨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리고 하후패 같은 경우는 강유와 장억과 금세 친해진 것이 말해주듯 기존의 군부 네트워크에 녹아든 인물이지 회제의 비호하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 진지-황호와 가까웠다는 얘기는 없다. 게다가 하후패는 귀순 시점에 이미 환갑을 넘긴 노장 중의 노장(...)이다. 회제가 주도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는 대임을 맡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둘째로 촉한의 인재난이다. 회제 말기 남아있던 소열제-제갈량 시대의 구신들은 [[강유]], [[요화]], [[장익]], [[종예]], [[호제]], [[동궐]], [[곽익]] 등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군부의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곽익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나이가 너무 많았다. [[맹광]]이나 [[내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이들은 [[초주]]처럼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적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이들 역시 나이가 너무 많았다. 황호를 총애한 게 아니라, 그나마 본인 시야 안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게 황호 뿐이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낙양으로 끌려간 이후 그제서야 [[극정]]의 식견에 감탄하며 진작에 중용했다면 하고 한탄[* 그래서 조선 시대 정조 같은 임금은 극정의 이 일화를 보고 그래도 회제가 군주고 말만 촉이 그립지 않다고 한거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했다.]한 것을 보아 걍 본인의 안목 부족 혹은 황호에 대한 총애가 지나쳤다고 봐야할 듯. 극정은 연의에서처럼 갑톡튀한 인물이 아니라 촉한에 30년 이상을 봉직한 인물이다. 즉,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소열제와 제갈량이 남겨준 도덕성과 능력이 검증된 인재풀이 소멸되기 전에 선대처럼 황권강화를 뒷받침할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친위세력 인재풀을 진작부터 육성해야 했는데 회제는 여기에 소홀했고, 결국 남은 대안이 없자 이전부터 총애하던 황호 같은 환관이 익숙하니까 국정을 맡기고야 만 것이 유선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강유의 황호 제거 간언 같은 사태가 발생할 지경으로 와도 사실상 황호의 전횡을 방치하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황권을 위해서 환관을 이용하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환관을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회제는 황제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또, 북벌의 경우 전쟁을 준비하면서 문무에 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이들을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삼아 그들의 유능함과 공적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하들이 불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가지는데 말년의 회제는 북벌을 강유에게만 떠넘긴 채 강유가 성공하던 실패하던 그를 제대로 보좌할 인재를 새로 선발하거나 중용하지 않았다.[* 진북장군으로서 북쪽을 진수하며 강유를 뒷받침했어야 할 진지는 성도에서 대사면이나 매년 연속으로 내리고 있었다. 생전의 제갈량이 제일 싫어할 나라 운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강유는 혼자서만 죽어라 분투했고[* 물론 [[유은]]이나 [[왕사(진군장군)|왕사]] 등과 같이 강유를 보필하는 인재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나이가 매우 많았다.] 혼자서 욕받이가 되었으며 북벌의 성공 가능성도 갈수록 낮아지게 된다. 즉, 본인이 국정 운영을 할 거면 본인의 인재풀을 만들어 쓰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소열제와 제갈량은 뭐 아무런 노력도 안하고 회제에게 남겨줄 그런 인재풀을 끌어 모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회제는 황제로서 국정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거기에 신경을 써야 했음에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촉한에 정무를 맡기고 황제에게 충성할만한 인물이 그렇게 없던 것도 아니다. [[극정]], [[번건]], [[왕숭]], [[문립]], [[수량]], [[이밀(촉한)|이밀]], [[두진]], [[진수(역사가)|진수]], [[이양]], [[두열]] 같은 촉한의 구신들은 서진 정권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꽤 출세한 인물들[* 워낙에 촉한의 기록이 부실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볼 때 촉한 인재풀의 문제점은 내정을 돌볼 만한 인재들이 없던 게 아니었다. 촉한 말기 인재풀을 살펴보면 문관 성향이 아닌 무관 성향의 인재들이 극히 부족해보인다. 오죽하면 '''60대 초반의 강유가 군부에선 어린 축'''에 들어갈 정도이다. 게다가 촉한 말기 고위급 장군직에 올랐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종예]]나 [[동궐]] 같은 경우는 문관으로 봉직한 세월이 압도적으로 긴 인물들이었다.]이다. 따지고 보면 황호에 의해 소외된 [[나헌]] 같은 경우도 원래 문관에 가까웠던 인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진지에 의해 소외되었던 [[방굉]][* 성씨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방통]]'''의 아들이다.] 같은 인물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