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선(삼국지)/평가 (문단 편집) ==== 무능했지만 권력 장악은 뛰어난 군주였다 ==== 국정의 상당 부분을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위임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회제는 동시기 위의 [[조방|전폐제]], [[조모(삼국지)|후폐제]], [[조환|원제]], 오의 [[손량|폐제]]처럼 무력하게 군주의 권리를 놓친 적은 없었다. 회제의 재위 기간은 자그마치 40년이나 되는데, 이는 삼국시대 모든 황제들 중 가장 길고, 전한-후한-촉한의 모든 황제 중 전한 [[한무제|무제]]의 재위 다음으로 가장 길다. 즉 이러한 점은 회제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황실의 위상을 유지할 만한 능력은 갖춘 전제 군주임을 보여 준다. 갈수록 재평가되듯 회제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리더십과 역량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적어도 황권과 신권을 적절히 조율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제왕학적인 면모, 정치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고단수에 가까웠다. 실제로 회제의 권력 장악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 소열제의 유언을 받들어 탁고대신인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거의 전권을 위임하여 전한 초기의 제도를 따랐지만,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더 이상 후임 승상을 임명하지 않고 즉각 [[한무제]] 이후의, 황제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는 제도로 권력 구도를 재편했다. 이는 상징적으로는 제갈량을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촉한의 신하로서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추켜세우는 것으로 대개는 제갈량에게 간택받은 인물들 혹은 추종자들로 짜여진 촉한의 인적 네트워크, 즉 신권에 존중을 보이는 표시임과 동시에 현실적으론 앞으론 그 누구도 제갈량과 같이 전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애당초 제갈량 생전에도 회제의 권위와 권력, 권한이 결코 적지가 않았다. 비록 정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선제 회제에게 조언하는 수준의 위치였지만 그래도 조정의 원로이자 거기장군이었던 [[유염]]만 해도 회제를 간통으로 의심하고 아내를 폭행해 감히 황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려하자 바로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하는 것을 보면[* 다만 제갈량에게 사죄하는 유염의 글을 보면 유염은 애당초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고 중대한 실수로 재판에 넘겨질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염의 처형은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 일로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촉한에서 회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회제가 재판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재판하는 관리가 황제에게 감히 기군망상의 불경죄를 저지른것은 설령 거기장군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알아서 회제에게 기었다는 소리니까. 이건 제갈량이 아직 살아있고 한중에서 북벌군을 막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성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갈량이 서거하자 그를 욕한 [[이막]]을 바로 죽인 것도 그렇고 회제는 제갈량-장완 시절에도 촉한의 황제로서의 막강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신하들의 생살여탈권을 쓰려면 얼마든지 바로 쓸 수 있었다. 단지 유능한 재상들에게 정사를 맡기는 게 더 편하고 굳이 심각한 일이 아니면 신하들을 해치지 않으려는 성품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그런 재상체제에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이양하고 이걸 인내하면서도 필요하면 '내가 안 써서 그렇지 주어진 권력을 쓸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보통의 권력 감각을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갈량 사후 그의 사당을 짓는 것을 불허하기도 했다. 물론 회제가 인간적으로 제갈량을 싫어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제갈량 사후에 [[이막]]이 제갈량을 비방하자 평소와 달리 크게 노하며 즉시 이막을 하옥하고 죽인다.[* 회제는 기록에서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 이막은 익주 토박이 출신에 재능과 명망이 있었지만 너무 오만하고 방자해 스스로 명성을 실추시켜 형제들인 [[이조(삼국지)|이조]], [[이소(촉한)|이소]],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요절한 형제가 이씨 삼룡으로 세간의 칭송받을 때 여기서도 소외될 정도로 돌출된 성격의 인물이다. 이막은 이미 회제 이전에도 [[소열제]]와 갈등을 빚다[* 소열제에게 대놓고 '''난 유장의 신하지 니 신하가 아니야, 이 새끼야. 너를 힘이 없어서 섬기지 니가 좋아서 섬기는 줄 알아?'''라는, 엄청나게 불경한 발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유장이 유언을 세습한 것도 정당하게 세습한 게 아니라 유언이 죽자 조정에서 유언의 후임자를 파견했는데 유장이 이를 날치기로 유언의 후임자가 되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추방했다. 그리고 그 관리를 유언의 후임자로 삼으려고 유장과 싸우다가 도망친 이가 다름아닌 [[감녕]]이다.] 그 재능을 아낀 [[제갈량]]의 변호로 겨우 화를 면한 인물인데, 그후 제갈량에게 중용받아 나름대로 출세 가도를 걷다 제갈량의 1차 북벌까지 종군했으나 신상 필벌의 원칙에 따라 마속을 처벌하려는 제갈량을 걸고 넘어져 결국 실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구해주고 중용한 제갈량이 죽자 [[마속]]의 처벌 문제로 자신을 실각시킨 원한을 잊지 못하고 곧바로 제갈량을 비방하는 걸 보면 배은망덕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회제도 이를 잘 알기에 예외적으로 크게 화를 낸 걸지도 모를 일이다. 이막과 비슷하게 마속 문제로 실각한 [[상랑]]은 별 말이 없다. 여담으로 사사건건 촉한의 최고 권력들과 쓸데없는 대립각을 세우다 결국 화를 자초한 이막과는 달리 형제 이조와 이소는 촉한의 최고 권력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조는 소열제의 총애를 받아 소열제의 한중왕 즉위에 논리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문서 작업을 담당했고 이릉 대전까지 종군했다가 패배하고 퇴각한 영안에서 사망한다. [[이릉대전]]에서 부상을 입어 죽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편. 이소는 제갈량의 총애를 받았다. 제갈량은 1차 북벌에 귀순해 온 강유를 두고 "양주 최고의 인물로 계상과 영남도 여기에 못 미친다"고 찬사를 보냈는데 여기서 영남이 바로 이소다. 계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량. 형주파를 대표하는 재능으로 일컬어지고 무엇보다 의동생으로까지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제갈량과 친분이 깊었던 마량과 같이 언급되는 걸 보면 재능도 뛰어나고 제갈량도 많이 총애한 듯. 어쨌거나 회제는 개인적으로는 몹시 신뢰하고 좋아한 제갈량이고 또 그 능력을 아주 요긴하게 잘 써먹었지만, 공적으론 제갈량 사후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걸로 신권이 황권의 경계를 넘어서는 걸 적절히 견제했다는 뜻이다. 군주 입장에서 회제는 위대한 대신에 대한 추종이 지나친 것을 경계했을 공산[* 부족한 군주 개인의 역량을 메꾸고자 신권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신하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되, 군주의 위엄과 황권의 위상을 격하시키지 않는 권력 분립의 균형 달성은 흔히 살얼음판을 걷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조금만 삐끗해도 황권을 망가뜨릴 수 있는 고도의 정치술이다. 물론 이걸 다 회제의 능력으로 보기는 어렵고 [[소열제]]-[[제갈량]] 두 사람이 구축한 이래로 확립된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룩한 촉한의 정치 시스템을 잘 계승해서 잘 써먹었다고 봐야 할 듯. 당장 위 [[조예|명제]]가 유능한 [[사마의]]에게 홀딱 빠져 권력을 무작정 강화시켜 [[고평릉 사변|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다만 조예는 부모의 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사마의에게 인간적으로 집착한 거라서 비교 대상으로는 애매하다.]이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단순 재상 개인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촉한의 인적풀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신권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에서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언에서까지 소열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맡긴 탁고대신이고 자신이 황제를 하기위한 기틀과 방향을 마련한 사람이다, 신권이 뭐고간에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도 사당을 세우는 것과 제갈량을 본받는 것을 장려하지 않고 오히려 사사로운 사당을 금지시키니 자신의 권위를 위한 일이라기에는 이상하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전제군주정에서 '왕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단 유교적 군주정의 논리대로라면 <군주가 신하에게 은혜를 받았다> 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해 군주를 보필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이기 때문. 물론 이것은 원칙일 뿐이고 원칙이 언제나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으니 현실적으로 제갈량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헌신적인 충성을 보여주었고, 이에 대해 회제 개인의 차원에서는 당연히 제갈량 개인에게 고마움을 느낄 만 하며, 실제로도 제갈량 사후 신하의 죽음에 황제가 사흘간 상복을 입고 애도하는 모습이라거나, 평소에는 사람 죽이기를 싫어했으면서도 이막이 제갈량을 비방하자 격노하여 바로 투옥하고 죽여버리는 모습까지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회제 개인의 감정 및 제갈량 개인의 품성과는 별개로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위대한 재상 제갈량이라고 해도 그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 게다가 사당을 (그것도 수도인 성도에) 세우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곧 그 사당이 모시는 대상(이 경우 제갈량)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숭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제갈량과 같은 충신을 본받는 것을 널리 장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한다면 유선은 이미 제갈량의 죽음에 대해 상복을 입는다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동을 해보임으로써 자신이 충성스러운 재상의 죽음을 얼마나 비통하게 여기고 있는지 공공연히 드러내보였다. (물론 이는 제갈량의 위상을 크게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으라고 장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더해 사당을 지어 지속적인 추앙의 대상으로까지 삼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견제'''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즉 본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설명하듯, 회제는 다른 통치역량은 어찌됐건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균형감각은 상당히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신권이고 뭐고 제갈량을 본받는것을 장려하지 않고 사당을 금지시키는 것은 이상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권력과 정치의 논리나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 행위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그저 단순한 개인간의 관계와 똑같이 보는데서 나타난 오류인 것.] 또 회제의 치세는 황족들이나 외척의 간섭에서 자유로웠으며 신권과 황권이 갈려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신하들끼리 당파를 나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파벌 다툼도 없었다. 당장 위와 오가 이런 [[고평릉 사변|문]][[이궁지쟁|제]]로 얼마나 피바람이 몰아쳤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년을 제외한 회제의 전반적인 치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만큼 [[소열제]]-[[제갈량]]이 깔아놓은 촉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인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유씨 황제의 확고한 권위하에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재상 중심 체제로서의 군신 관계'''를 제대로 이행하고 또 이용한 군주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안배한 인재들의 능력을 통한 것도 상당했겠지만 즉 회제의 치세 동안 오직 황제의 그림자 밑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환관 황호만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장 [[십상시]]를 보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조차 국정에 간섭했는 데 반해 황호는 그러지 못했다.] 그만큼 촉한 황실의 위상이 동시대 타 국가에 비해 확고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기의 회제는 내정의 황호, 외정의 강유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갈량이 올린 [[출사표]]에는 '후한이 망한 이유는 환관과 소인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도 회제는 황호를 가까이 한다.] 막판에 강유 등을 견제한 것에 대해서는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지만 회제의 헤게모니는 제갈량 사후 승상직을 공석으로 남겨놓은 것이 말해주듯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고 회제는 끝까지 강유와 황호 둘 다 죽이거나 내치지 않고 안고 가려고 했다. 회제의 즉위 40여 년 동안 제갈량과 강유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30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북벌을 행[*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제갈량조차 4차 북벌과 5차 북벌 사이엔 3년의 텀이 있었고 강유 자신이 계획을 수립한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 20여년 후이기 때문.]했는데, 정말 회제가 강유를 견제해 북벌을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옹, 양주를 아우른다는 목표 달성에 계속 실패한 강유의 북벌을 얼마든지 중단시킬 명분도 권위도 여론도 다 갖추고 있었지만 북벌 자체를 회제가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었다. 강유가 황호를 죽이려 한 것처럼 황호 역시 강유를 상당히 미워했을 텐데 회제는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자 역할을 하려고 했을지도... 다만 황호를 강유보다도 더 신뢰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자세히 보면 회제는 [[장완]] 사후부터 친정을 시작하며 황제권을 계속 늘려갔으니 일하기 싫어서도 아니다. 황제 노릇 하기 싫고 그저 놀고만 싶다면 태자 유선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군림하면 그만이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탁고대신 제갈량이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면 장완때부터는 황제 스스로가 신권 1인자에게 개부 명령을 내려 실질적으로 북벌 계획을 명령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제가 친정하기 전 부터 말이다. 촉한의 이념이 한실부흥이고 여기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제갈량 사후 북벌을 주도하는 권한이 실질적으로 회제에게 있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자치통감과 후주전에 보면 장완시기인 236년에 전(湔)현에 이르러 멀리까지 관람할 수 있는 조망대인 관판[* 수경주에 따르면 도안현에 도관이 있는데 촉의 태수였던 이빙이 여기에 큰 제방을 만들었고 이를 전붕, 혹은 전언이라고 하고 그 위에 관판이라고 조망대가 있었다.]에 올라 문수(汶水)의 강물을 구경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목에서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은 후 회제가 (촉한 지역을) 유람하고 관람하는 걸(游觀) 아무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 장완 시절부터 회제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비의]] 때부터 회제는 본격적으로 친정했고 이 시기 강유의 북벌이 철저하게 회제가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강유의 입지상 강유 혼자 북벌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는 점도 이를 시사한다. 애당초 제갈량이 후계자로 지목한 장완과 비의 같은 경우도 그렇다. 장완의 경우 제갈량이 평소 성질이 나쁜 [[양의]]가 자신이 죽고 나서 대신하는 일이 없도록 [[장완]]을 추천한 것에 가깝고 비의는 회제가 제갈량 사후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상의하기 위해 직접 [[이복]]을 자신의 대리자로 [[오장원]]에 있던 제갈량에게 보냈을 때 장완과 같이 추가적으로 지목된 것으로 회제가 제갈량더러 사후 후임자를 정하라고 한 것에 가깝다. 또 비의는 [[진지(삼국지)|진지]]를 중히 여겨 회제를 모시게 했고 회제 역시 진지를 총애했다. 이는 회제가 친정을 시작하던 비의 시기에 제갈량의 후계 세력이 회제와 잘 영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회제 말년에 [[강유]], [[진지]]-[[황호]]-[[염우]], [[제갈첨]]-[[동궐]]-[[번건]] 모두 어느 누구도 정국의 주도권을 못 갖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운다. 회제는 이 세 그룹들을 다 중용하며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권력을 나눠주었다. 동시기 조위와 손오에서 권력투쟁에서 밀린 정파와 인사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갈려나가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는지를 감안한다면 아무리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하에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가져간 촉한 특유의 정치 생태계라지만 이건 황제의 결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건 뒤집어 말하자면 어느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고 최종 결정권자인 회제의 권력이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파벌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회제 입장에선 꽤 효과적인 권력 분배였던 건 사실이다. 반면 위나라의 경우 조예 이후 이를 할 수 없는 황제들만 배출되었고 결국 [[고평릉 사변|사마씨가 나라를 삼켜버렸으며]] 오나라의 경우 손권을 시작으로 손준과 손침이 손화파를 싸그리 숙청해버렸다. 문제는 이 권력 분배의 한 축에 능력도 인성도 안 되는 간신 황호가 있었다는 점. 진지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품성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능력은 있어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남겨준 신료들을 신뢰하고 중용하고 권력을 맡기면서도 황실의 위상을 유지하는덴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정작 그 인재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노회하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국정을 이끌어가고 또 함께 만들어나갈 인재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닥치자 자신에게 아부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예스맨들만을 기용하여 중히 쓰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선 정말 회제가 진지나 황호 말고 다른 대안을 찾았더라면 촉한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전폐제와 오의 소제는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불과 1~2년 이내에 권력을 빼앗겼고, 위의 후폐제, 원제, 오의 경제는 허수아비로 즉위한 경우인데, 심지어 경제 손휴는 권력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게다가 즉위당시 회제보다 입지가 좋았다고 보기 힘든 위 문제나 명제는 물론, 처형당한 죄인의 아들이자 막장군주였던 오 말제마저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에서 17세의 나이에 충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즉위한 회제가 9살짜리 어린아이에 비해 나았다고 해서 '권력 장악에 뛰어났다'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위 문제, 명제, 오 말제 등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사치를 부린 것에 반해, 회제는 동윤의 간언에 꼼짝도 못하고 두려워했고 그의 사후에 황호와 진지 등의 협조를 받고나서야 마음껏 사치를 부린 것을 보면, 촉한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겠지만 권력 장악 능력도 오히려 수준이하였던것으로 보인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권력 장악력이란 단순히 '쫒겨나지 않는 능력' 의 수준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장악력까지 포함한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호족이나 문벌의 득세를 통제하지 못한 위, 오에 비해 회제의 촉한은 어쨌건 황제 개인에게 권위와 전권이 집중되는 체제였던 것. 물론 이것은 회제의 능력으로 인한 성과라기보다는 소열제가 기초를 닦고 제갈량이 완성한 권력 구조 위에 회제가 잘 올라타서 가능했던 일로 보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보면 촉한이라는 나라 전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장악력'이 특히 명확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