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상규(1897) (문단 편집) == 생애[* 서홍관. (2022). 외과의사이면서, 독립투사였던 유상규(劉相奎)의 강직한 삶. 대한의사협회지, 65(9), 624-626.] == 유상규는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 강계군 명신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신학교를 1916년 3월 졸업한 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1기로 입학한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떠나 4년동안 안창호의 비서, 그리고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으로 일했다.(당시 교통국은 독립운동 자금을 가져오는 비밀통로였기에, 확실한 신뢰없이는 맡을 수 없는 자리였음) 상하이 임시 정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내분으로 인해 그는 1923년 6월, 일본으로 이동하여 1924년 1월까지 노동자들과 동거하며 토목, 비누공장 일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의 노동 생활은 유상규가 1926년 5월 1일 '동광'의 창간호부터 8호까지 연재한 글인 '방랑의 일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2009). 식민시대 지식인, 유상규(劉相奎)의 삶의 궤적. 의사학, 18(2), 157-172.] 1924년 1월 15일,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22일만인 1924년 2월 6일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다.(체포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검속으로 추정) 1925년 4월 13일, 6년 만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27년 3월 23일 졸업한 뒤 그해 이애신과 결혼하였다. 이후 1928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임명되는데, 이는, 이미 교수였던 경성의전 동급생 백인제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의 오자와 교수 지도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1936년 박사학위 '약리학적 입장에서 관찰한 Roentgen선 작용에 관한 일고찰에 취하야'를 작성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