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비/혈통 (문단 편집) === 후한 말엽 당시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건 불가능하다 === 이는 [[족보]]라는 물건이 단순히 전근대시기 이전까지 공통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착각이다. 같은 '족보'여도 명칭만 같을 뿐, 유비가 살던 2~3세기와 17~18세기 이후 시대의 족보는 사실상 별개의 물건이었다.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 행위는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짜 족보가 나돌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집집마다 제각기 족보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짜라도 일단 족보를 만들어두면 그 문헌에 근거해서 같은 조상이라고 우겨서 끼어드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쪽도 '문서화'된 족보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영부영 일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족보 위조 행위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날조라기보단 어느 정도 몰락한 잔반과 금전적 거래로 말을 맞췄다. [[양반전]]이나 [[태평천하]] 등 당대의 족보 문제를 다룬 작품을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또한 개인 뿐만 아니라 문중에도 여러 혜택을 주는 등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기 때문에 암묵적인 합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이 조선시대 후기의 사정이다. 후한을 비롯해서 인쇄술 발달 이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에 족보가 집집마다 있는게 아니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쇄술이 없었고, 종이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집집마다 족보를 한 부씩 갖추는 건 불가능했다. 즉, 족보는 일족의 유력자나 관청에서 보관되거나, 유력자의 묘비문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친족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로의 관계를 식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친족을 인증하는 것은 일단 친족 서로 간의 기억과 유력자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헌 정보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록 문화가 발전하기까지 집안과 친인척 관계를 중요시하지만 따로 족보가 없는 경우에는 씨족이나 부족의 혈통을 전적으로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조상 직계는 4대는 기본이고 그 이상도 외우기도 했으며 그들의 자손관계까지 외우는 경우도 흔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예전엔 [[팔고조도]]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위아래로 본인의 혈연관계를 외우는 것이 기본 소양이었다. 유교문화권의 제사를 비롯해 전근대 종교의식을 그렇게 강조했던 것도 그렇게 한 번 일가를 싹 모아야 가족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은 피휘 문화로 이름자를 물려쓰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제사를 통한 친족 회합이 중요했다. 이쪽은 대신 항렬자라는 개념을 만들어 친족 식별에 활용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 기록기술과 문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많은 문화권에서 보였던 공통된 현상인데, 이름 자체를 XX의 아들 XX 하는 식으로 짓거나 자기소개를 할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밝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서양 중세물이나 이슬람 문화권, 유목민족 등을 다룬 매체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이름만 말하는 게 아니라 "A의 아들인 B의 아들 누구요."하고 내력을 대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만 봐도 아라고른은 자신을 소개할 때 꼬박꼬박 '''아라소른의 아들 아라고른이오.'''라고 말한다. 또한 현실에서도 일부 문화권은 아예 작명 방식에 이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부칭(父稱)이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 푸틴 가문의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 사우드 가문의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 등. 또한 서양에서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이름을 물려줘가며 OO X세, OO 주니어 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예시: [[부르봉 왕조]] - 루이 XX세.)] 친족을 사칭하려면 그들에게 가서 집안 내력을 말하고 기억을 맞춰야 했는데 생판 남인 외부인이 끼여들기 불가능했다. 당장 나 누구 자손이오 라고 칭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본에 그들의 형제 관계와 자손 내역까지 말하는 게 기록 기술 발전 이전에 기본이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많이 이러한 개념이 퇴색되었지만 아직도 농촌의 집성촌에 가면 사촌을 넘어서 팔촌까지 족보를 외우는 노인도 있다.[* 팔촌은 현대에서는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과거 개념으로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다. 특히 다 같이 대대로 사는 집성촌이라면 "네가 누구 아들이냐?" 한마디만 물어봐도 촌수가 바로 나온다.] 후한시대는 농경사회다 보니 요즘처럼 도시로 나가서 일한다든가의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이 멀리 퍼져사는 시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사는게 기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친족 사회는 조선시대 양반들도 한 수 접고 갈 정도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족임을 사칭하여 끼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친족을 강압하거나 일시에 속여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시에 변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족보 위조 행위가 벌어지려면 끼어듦을 당하는 문중도 한미해야 하고 끼어들 사람의 집안 자체도 상당히 잘 나가야 했다. 끼어드는 사람은 족보를 위조하고 누군가를 매수할 돈이 필요하고, 문중은 그런 지원을 받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해야 했기 때문. 하지만 유비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가내 수공업으로 근근이 목에 풀칠하고 살던 가난한 청년이었단 건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의 공부도 좀 잘나가는 집안 어른이 돈 대줘서 겨우 마쳤고 나중에 유명해진 후에도 돗자리나 짜던 놈이라고 인신공격을 당할 정도였는데 족보를 사서 황족을 사칭했다기엔 가세가 너무 기울어있지 않은가? 거의 조선 후기의 [[잔반]] 수준인데 이 정도면 유비는 족보를 팔아서 누군가를 문중에 끌어들이는 쪽이라면 몰라도 족보를 사서 문중에 끼어드는 쪽은 절대 될 수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곤 해도 엄연한 나라의 최고 가문인 황실이 족보 위조 행위를 용인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진짜로 황실을 사칭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더욱 커지는데, 이 때의 이름난 군벌들은 유표나 유장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황족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칙명에 의해 붙여진 벽보에 따라 근왕의 기치를 내걸고 발흥하여 황건적 소탕을 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다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 조정과 황제는 사실상 군벌들의 꼭두각시가 됐지만 어쨌든 그들은 엄연히 황실의 권위와 황명에 기대 발흥한 세력이었기에, 그 권위에 기대어 경쟁자를 역적으로 몰아 황명에 따라 합법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커지던 때, 그들 앞에는 "군벌을 이끌고 여러 방법을 거쳐 자력으로 성장한 촌뜨기 출신의 숨은 고수가 알고보니 황실의 친족"이라는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자기들도 모르는 새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군사적 능력도 '''머나먼 관계나마 일단은 황족인 혈통도''' 인품도 제위를 이어받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태자 없이 갑자기 죽거나 한을 부흥시키기 위해 태자를 쌩까고 후계자로 유비를 지목해 대뜸 제위를 줘버리면 명분상 반대할 이유가 없는, 황실을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다른 군벌들에겐 초비상이 걸린다. 이제 그들에게 남는 선택지는, 후한의 황제가 된 유비에게 숙이느냐 "웃기지 마라"를 외치며 되든 안 되든 반항하느냐 뿐.] 그 경쟁자는 인품이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그 인품을 믿고 근왕의 기치 하에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혈통을 경계하여 사칭범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해 혈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 사칭범이면 이 시기에 이미 집중공격을 받아 세력이 끝장났겠지만, 밑에 써져있다시피 황궁 내부사정을 모조리 꿰뚫는 조조조차도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적이 된 유비를 비하하는 욕설이 고작해야 "돗자리 장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