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비/혈통 (문단 편집) === 칭제 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을 한 이후 물러났다. 이에 유비는 [[조비]]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자신도 황제가 되었다. 당대 [[후한]]에서는 황족과 황족이 아닌 자에 대한 경계가 명확했으며 이 때문에 똑같이 칭제를 하더라도 [[원술]]은 온 천하가 적대한 반면, [[유표#s-1|유표]]와 [[유언(삼국지)|유언]]이 칭제했을 때는 그런 반응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유비가 칭제를 할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유비의 칭제를 [[헌제]] 퇴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칭제로 인정하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유비가 황족이었기에 헌제를 대신해서 한의 황제를 계승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당시 그 [[손권]]조차 이를 우려해서 함부로 칭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유비는 바로 칭제를 하고도 그 제위가 그대로 인정되었던 것은 이게 황족인 유비와 황족이 아닌 손권의 차이이기도 했다. 물론 손권도 나중에 칭제하긴 하나 그것은 229년, 즉 이로부터 9년이나 지난 시점[* 이때가 삼국지 1세대 [[최후의 생존자]]인 [[조운]]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에서 후한이 완전히 멸망한 게 인증이 되고 나서야 칭제한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한 것도 '왕'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당시 촉나라는 [[한중 공방전]] 상황이었으며 유비는 자신이 한중을 지배해야 하는 명분을 제시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명분을 만들려고 한중왕에 등극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유비는 촌수야 좀 멀긴 해도 황족이기 때문에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더라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손권]] 역시 [[유비]]를 한중왕으로 인정했다. 이 왕이라는 자리는 군웅할거 시기에 가장 세력이 강성한 황족이었던 유표, 유장조차 감히 칭할 수 없었던 지위다. 한 마디로 말해 [[유비]]가 황족이었기에 한중왕에 등극할 때에도, 심지어 [[천자]]로 제위할 때에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만약 [[유비]]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한중왕으로 등극할 때 이미 누군가가 반드시 딴지를 걸었을 것이다. 이는 한고제 유방이 한신, 팽월, 영포 등의 제후를 숙청한 뒤 유씨 황족만이 왕으로 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조]]가 동소의 발의로 위공에 오를 것과 구석을 청할 때 [[순욱]]이 나서서 말렸고, 조조가 위공에 오른 것은 순욱 사후 1년 뒤였다. 유비 비방을 위한 프로파간다 기록이 아니냐고 의심받는 영릉선현전의 언급들을 봐도 유파, 옹무, 비시 등이 유비의 칭제를 반대하면서 댄 근거들은 하나같이 '아직 세력도 약한데 칭제해봤자 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이었지 유비의 혈통에 문제가 있다는 언급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 후한 당시 '왕'이란 것은 실권은 적은 직책이었고 실제로 조조도 위공->위왕의 루트를 타긴 했지만 위공에 올랐을 때 이미 제후왕들보다 높은 의전서열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직위는 당시 관례적으로 '''황족'''들에게 주는 직위였기에 조조가 왕에 올랐을 당시 (공 즉위로 이미 안 좋던 상황에서) 여론이 더욱 안 좋아진 것이다. 실제로 형주공방전 당시 위나라의 세력 내에서 관우에 호응해 반란이 일어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즉 황족이 아닌 조조가 왕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심지어 황제가 직접 임명했음에도)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여론이 안 좋아졌는데, 유비는 한중왕을 자칭한데다 칭제까지 했는데도 이런 식의 여론이 없었다. 이는 적어도 당대 중국인들 사이에선 '유비가 황족이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