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비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조부는 [[유웅]]이며 부친은 [[유홍(후한 황족)|유홍]]이다. 유비의 아내로는 [[소열황후 감씨]],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오씨]]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삼국지)|유선]], 차남 [[유영(촉한)|유영]], 삼남 [[유리(촉한)|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했으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촉한)|유영]](劉永)의 손자 [[유현(성한)|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로부터 안락공의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유선의 사위였기에 제갈씨에 유비의 피가 섞여있는 것도 맞다.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비의 후손은 아래 단락에 나온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 조상님이 거병하기 전에 했던 같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설에서는 짚신 장사는 일종에 마케팅이고, 실제로는 관리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돌보는 격이다.]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후한)|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고대에 여성들은 금수저가 아닌 이상 전리품 취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른 이도 아닌 조조의 숙적 유비의 딸이었으니 조조 본인이 분풀이로 취했거나 조순에게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 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유봉에게 좋게 언급한 것인데, 번성의 포위가 풀리기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 8월에 도착하여 지원병을 충분히 받은 [[서황]]이 만총과 연계해 10월에 번성 포위를 풀었다.] 두 달이면 지원을 가기에 충분한 기간적 여유가 있었으며, 형주자사와 상용 동쪽 남향군 태수가 위군을 지원했다가 [[관우]]에게 토벌당해서 상용 동쪽은 공백지라 지원이 가로막힐 가능성도 없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아 보급 문제도 있던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만다. 내부의 반란이 우려됐으면 [[유봉]]이나 맹달 중 한 명은 반란에 대비할 병력만 남기고 남은 한 명이 갔어도 됐다. 애초에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파견한 이유가 상용에서 [[관우]]를 언제라도 지원할 것을 염두에 뒀으며, 실제로도 신속히 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배치인데 반란 우려를 핑계로[* 맹달은 상용이 지키기 유리한 곳이라고 언급까지 했다.] 서로 주도권 싸움이나 해대며 결국 [[관우]]와 남형주를 잃었으며, 상용도 결국 빼앗겼으니 후계자 문제 이전에 큰일을 그르친 것만으로 처형당할 이유는 충분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 유비와 같은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간혹 본인들이 유비의 후손인 것으로 착각하지만, 한국의 劉 씨는 사실 흉노계 성씨로 본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유(성씨)/목록, 앵커=성씨 劉(죽일 류\, 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