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비 (문단 편집) == 개요 == >선주(유비)는 포부가 크고 굳세며, 너그럽고 후했다. 인재를 알아보고 선비를 잘 대우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마음에 다른 길이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공정함은 고금의 아름다운 본보기다. 기지와 임기응변, 재능과 모략은 [[조조|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는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결코 이익만을 다투지 않았기에 해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 >[[진수(역사가)|진수]]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촉한]](蜀漢)[* 계한(季漢), 혹은 유촉이라고도 한다.]의 초대 [[황제]]. [[후한]] 말 [[장거]], [[장순#s-3]]의 난 진압에 참여하며 처음 공적인 기록이 시작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부곡]]으로 불리는 후한 말 [[사병]][* 한국 매니아층에서 중국사를 논할 때, 이런 사적인 전사 집단을 흔히 '유협집단'이라 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학술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바가 없고, 도덕적 가치판단이 섞인 단어이므로, 여기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급적 정확한 언어를 사용한다. 후한 말 군벌 연구에서는, 서로 쓰는 단어는 다를지라도 군대 구성의 중요한 골자가 부곡으로 대표되는 사적 전사집단임에 동의한다. 세력이 큰 가문이 방위를 위해 예속민을 무장시켜 형성된 경우, 혹은 지방의 군대가 특정 장교 아래 사병화되어 형성된 경우, 마지막으로 지역의 유랑민(모든 종류의 적賊)들이 무장하며 생겨나는 경우가 모두 있었다.(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huskarl, 혹은 로마 내전기의 군단과도 유사점이 있다.]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관군을 도와 진압에 참여했다. 이후에도 군사력을 바탕으로 [[공손찬|여러]] [[조조|군벌들]] [[원소(삼국지)|사이를]] 떠돌며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관도대전]]이 끝난 후 [[형주]]를 장악한 군벌이었던 [[유표]] 아래에서 힘을 모았고, 유표가 죽고 [[유종(삼국지)|후계자]]가 북중국을 통일한 [[조조]]에게 항복하자 남부로 도망쳐 [[손권]]과 연합하였다. [[적벽대전]]에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고 [[손권]]과의 합의를 통해 남형주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유비는 손권의 [[익주]] 진출을 막으면서, [[유장]] 아래 반대파의 지원을 받아 지원군이라는 형태로 [[유비의 입촉|익주로 입성하여 힘을 길렀다.]] 유장이 자신의 계획을 알아채자, 유비는 전쟁을 벌여 익주를 정복하였다. 뒤이은 [[한중 공방전|한중 전역에서 승리]]해 조조군을 몰아냄으로서, 익주에는 유비를 제외한 다른 거대 군벌의 군사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한중왕(漢中王)으로 자칭함으로서 독립의 기틀을 닦았다. [[조비]]가 선양을 통해 [[후한]]을 [[조위]]로 대체하자,[* 위나라(魏國)는 212년 후한의 행정구역으로서 처음 세워졌고, 216년에는 조조가 위왕에 오름으로서 세습이 가능해졌다.] 스스로를 한의 황제로 선포하였다. 즉위한 뒤 1년이 되지 않아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손권]]을 향한 [[이릉대전|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곧 사망하였다. 후계는 [[유선]]이 이었으나 국가의 실질적 운영은 [[제갈량]]과 [[촉한사영|그의 후계자들이]] 주도하였다. 유비는 사후 여러 정치적 이유로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낭만화되었다. 육조에서 수, 당나라 대까지 낭만화는 비교적 미비하였으나, 북중국을 정복한 [[전조]]의 건국자이자 흉노인 [[유연]]이 자신의 미약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유]]씨 성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첫 씨앗이 뿌려졌다.[*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금나라|전통적인 중화의 영역인 북중국에서 밀려나]] 남부로 쫓겨난 [[남송]]대에 이르러서,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식인과 대중 양 쪽에서 "우리는 악한 적에 의해 밀려났으나, 여전히 천하의 적법한 통치자다."라는 정통성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비와 [[촉한]]은 주요한 역사적 설명들이 왜곡될 정도로 강하게 미화되었다. 원나라 대에 [[삼국지평화]]와 같은 초기 소설이 출현하였고,[* Idema, Vernacular Fiction, 97.] [[명나라|명]] 초기 인물인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연의]]>를 저술하며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아 [[유교]]적 덕목인 '''인의의 화신'''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묘사가 일반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비의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현대 동아시아에서 유비와 그의 충직한 신하들[*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제갈량]] 등]은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이들을 다루는 문화 상품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으며, 주요 행적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현대 사학계에서는 긴 시간 동안 낭만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유비라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이 어려워진 점을 지적하고 있다.[*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