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병언 (문단 편집) == 생애 == [[1941년]] [[일본]] [[교토시]] 출생으로, 해방 이후인 [[1946년]] 부모의 고향인 [[대구광역시]](당시 경상북도 대구시)에 정착하였다.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2년 선교사인 길기수의 설교를 듣던 중에 마태복음 22장 설교를 듣던 중에 회심 경험을 하고, 권신찬 목사와 선교 사역을 함께 했다.[* "20대 청년이었던 유병언씨는 젊은 나이에 신앙생활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고민해 오던 중 역시 같은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씨의 집회설교 중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듣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22:8-12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예복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의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고 의의 옷을 입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으며 그는 미국의 또 다른 선교사 딕 요크 씨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에서 평신도 전도인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후 유병언씨와 권신찬 목사는 함께 ‘평신도복음선교회’(기독교복음침례회 전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날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03|#]]] 그러던 중 같은 선교학교 출신이었던 목사 [[안동 권씨]] 권신찬(權信燦)의 딸인 권윤자(權允子)와 결혼하였다. 초창기엔 [[대구광역시|대구]] 지역에 위치한 자신의 집 '칠성예배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특별시|서울]], [[인천광역시|인천]], [[안양시|안양]] 등지로 영역을 넓혔다. TEAM 선교부가 유병언이 속했던 평신도복음선교회와 한국어 방송 공동운영 계약을 맺으면서 유병언은 부국장으로 취임 했으며. 부국장 취임을 위해서는 목사 안수가 필요하다는 선교사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극동방송국을 운영했던 TEAM 선교부 미국인 선교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유병언은 사업가로 변신하여 [[1974년]] 부도 직전의 부실 무역 기업인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해[[1976년]] 사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1979년]] [[세모그룹]]으로 상호를 바꾸었다.[* 세모라는 이름은 삼각형의 순 우리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언론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모세]]를 거꾸로 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 정정보도 되었다.] [[1981년]] 12월 필요에 의해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 설립 당시 평신도 복음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해온 유병언은 교단 설립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취득하여[* 당시에 사전 공개된 유람선이 호랑이 형태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측은 호랑이 이외의 다양한 동물 형태의 유람선을 만들겠다고 얘기했지만 반응이 너무 좋지 않아 일반적인 형태의 유람선으로 바뀌고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었던 호랑이는 서울 대공원에 전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주목을 받았다. [[1990년]] [[태풍]]으로 떠내려온 경쟁업체의 유람선이 선착장에 정박 중이던 세모 유람선 2척에 충돌하면서[* 당시에는 원광유람선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했으나 이 사고 이후 세모그룹에 매각, 1997년에 폐업하였다. 참고로 [[원광대학교]]와는 관련이 없다.], 그로인해 세모 유람선이 표류하다가 [[마포대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하여 세모 직원 1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하였다.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에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 사건과 무관한 1983년경 무죄로 판결되었던 교인들 헌금과 관련한 상습 사기 사건으로 1992년 4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대양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당시에도 전부 무혐의로, 그와 별건인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의 헌금을 상습 횡령하였다는 혐의로 형을 살게 되었는데 오대양 사건과 관련이 있어서 처벌을 받은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상습사기죄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는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도 유병언 전 회장은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고 살아있는 동안 기회가 되는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유병언 전 회장과 오대양 간의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뭐라도 체포할 혐의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별건 수사인 과거의 불기소된 사건을 억지로 들춰내어 혐의를 씌우고 형을 살게 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한다. 1997년에는 무리한 투자로 세모가 부도가 났다. 부도 이후 세모의 해운 사업은 1998년 온바다해운(2006년 경영난으로 폐업)을 거쳐 1999년 3월 [[청해진해운]]으로 승계되었으며, 한강 유람선 사업은 2004년 세양선박에 매각되었고 이후 [[이랜드그룹]]으로 넘어갔다. 이후 유병언은 대외적으로 기업 활동을 중단하였다. 2014년, 유병언은 당시 언론보도에 의해 청해진해운의 실세이자 세모그룹의 회장으로서 [[세월호]]의 소유자라 알려졌으나, 실제로 관련 주식은 소유한 사실이 없었고 이후 관련 재판이나 특조위 조사에서 소유 여부나 참사원인에 대하여 관련여부가 밝혀진 바 없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100% 유병언에게만 전가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 없이 세월호 참사 직후 책임에 대한 많은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대통령부터 나서서 유병언과 그 관련 종교단체를 부각시켰다.이것은 유병언과 그 아들에 대한 현상금 규모 하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후 유병언이 사망한 채 발견되자 많은 언론들이 정부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돌리고자 했다는 식의 평가를 내기도 했다.[[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mod=news&act=articleView&idxno=131999 | 기자의 시각 '돼지머리 수사', 조선일보]] 또한, 2014년은 당시 유병언 회장과 구원파에 관련해 방송기자연합회에서 '저널리즘의 침몰'이라는 반성의 보고서를 낼 만큼 오보가 많았던 해로 꼽히기도 한다.[* 사고 일주일째,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방송 뉴스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유병언씨와 그가 속한 구원파에 맞추기 시작했다. 특히 구원과 관련 뉴스에는 종교적인 신비주의가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시점부터 점차 '세월호'뉴스는 '유병언과 구원파' 뉴스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윤지상주의, 방만하고 무책임한 관리감독 체계, 전혀 작동하지 않는 매뉴얼, 무능한 정부기관간의 불협화음 등 '세월호 참사'로 드러 난 온갖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특정 종교의 문제로 몰아가고, 여기에 이단종교라는 분위기까지 더한 전형적인 본질 희석' 보도였다._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 내용 중에서] [[http://reportplus.kr/notice/%E3%80%8E%EC%84%B8%EC%9B%94%ED%98%B8-%EB%B3%B4%EB%8F%84-%EC%A0%80%EB%84%90%EB%A6%AC%EC%A6%98%EC%9D%98-%EC%B9%A8%EB%AA%B0%E3%80%8F%EB%B0%9C%EA%B0%84/ | 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 2014년, 경찰은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유병언과 그 가족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유병언과 그 가족들은 경찰을 피해 도망간다. 경찰은 도주한 유병언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고, 검찰 역시 처음에는 유병언에게 5천만 원, 그의 장남 유대균에게는 천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10배인 5억 원, 1억 원으로 각각 인상했는데 이는 한국 역대 최고 현상금이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수색과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유병언은 체포되지 못 하고 결국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용의자 사망에 따른 [[공소권 없음]] 처리되어 범죄자 분류가 붙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를 기소한다고 무덤에서 걸어나올 리가 없고 설령 부활한다해도 체포를 해야 기소-재판-형 선고의 절차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7033782?sid=102|국과수 "변사자는 유병언…사인 판명은 불가"]][[https://www.news1.kr/articles/?3487067|최영식 국과수 원장 "아직도 유병언이 살아있다고 믿으시나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유의 공원과 베르사유 미술관에서 '아해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해외 박물관과 미술계 관련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프라하 국립미술관 총관장인 밀란 크니작은 아해의 사진들에 대해 “너무나도 단순하고, 겸손하고 평범하다”고 평했으며, 아해의 사진은 그 외에도 베르사유궁 관장 등 현지 전문가들이 인정한 내용의 인터뷰를 한 바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a4pe25hWss&feature=youtu.be |인터뷰 영상]] 그러나 국내전문가/평론가들에 의하면 그의 [[사진]]은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아직 국내 미술시장에서 가치가 형성되지 않은 이유로, 작품들 대부분이 일종의 뒷돈을 위해 겉으로는 사고 파는 것처럼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었다며 전시회 성사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는 전시 성사를 위해서가 아닌, 전시 성사 후 감사 표시의 기부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삼성전자의 경우에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궁전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후원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