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럽사 (문단 편집) ====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등장 ==== [[서로마 제국]]이 476년 사실상 소멸한 이후, 제국의 잔해 위에 게르만 왕국들이 대규모 모습을 드러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 신화|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두 개의 정통파 교회인 [[가톨릭]]과 [[정교회]]는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정치적·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면서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강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여전히 강성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수호자로 남아 지원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권력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기독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고,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물론 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항상 같은 편이었던 것은 아니고, 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1명일 뿐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기독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하지만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가 [[성상(조형물)|성상]]파괴령을 내리자 양 교회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은 지속적으로 금이 가다가 훗날 1054년 종교 대분열에 의해 붕괴되었다. 한편 8세기경 [[아랍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족 출신 군주들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유혈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랑고바르드족]], [[앵글로색슨족]] 역시 자신들의 왕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루스 마르텔]]이 등장하여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그는 아버지 [[피핀 2세]]를 이은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랍-이슬람군을 패퇴시키고 서유럽을 지켜냈다. 이것은 유럽 내 아랍 세력의 퇴각 개시를 알리는 사건으로, 훗날 1492년 이베리아 반도의 군주들이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를 점령하면서 끝나게 된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고 그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제국을 재조직하였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유산과 게르만족의 문화,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세 가지 가치를 포괄하는 통일체를 실현하였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 법에 따라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카롤루스 대제까지는 프랑크의 세속군주가 가톨릭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제도|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의 [[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귀족|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이렇게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교황령의 통치권과 세속 국가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성직 서품권 등으로 교황권이 매우 막강하다보니 교황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곤 했으며, 이런 암투 끝에 오른 교황들이 성품이나 자질에서 막장인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비판받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