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도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jigoro_kano.jpg|width=100%]]|| [[파일:가노 지고로-맨손 조르기.jpg|width=100%]] || || 근대 유도의[* '유도'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기 이전의 형태로서 [[일본]]에 존재하던 [[그래플링]] 무술의 역사는 [[유술]], [[일본 고류 무술]] 문서 참조.] 창시자 '''가노 지고로''' || [[리어 네이키드 초크|맨손조르기]]를 시전하는 가노 지고로 || 1882년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가 창설한 '''[[강도관]](講道館, 코도칸) 유술이 기원이다.''' 가노 지고로는 여러 고류 유술들을 참고하였는데[* 강도관 유술에서 수련에 들어가기 전 실시하는 낙법은 '''관구류(關口流, 세키구치류)'''에서 정리된 것이다. 이 낙법이 개발되자 카타(形)위주로 유술을 하던 에도시대 때 일본 유술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고 유도를 근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구류는 기도류와 함께 에도시대의 저명한 유파로 야와라(柔)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하였으며, 야와라(柔)의 정신은 노자의 유능제강의 이치에 근거하여 창출하였다.] 그 중 본인이 익힌 유파인 '''기도류(起倒流, 기토류)'''[* 과거 푸틴이 아베랑 어디 작은 체육관 같은 데서 보고 있던 그 갑옷 입고 넘어뜨리는 그거다. [[https://www.youtube.com/watch?v=KqMffzXtpno|영상]]. 헌데 그 체육관이 바로 강도관이다. 물론 앞뒤 다 잘라먹고 개그 소재로 쓰인 점은 있지만, 기술 전체를 봐도 유도보다는 영 껄쩍지근함은 변하지 않는다.]의 메치기, '''천신진양류(天神眞楊流, 텐진 신요류)'''의 급소 지르기와 굳히기 기술들을 중심으로 하여 초창기 강도관 유술을 정립하였다. 또한 가노의 유도는 심신을 단련하는 데 목적을 둠으로써, 승패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유술들과 차별성을 두었다. 현재의 유도는 [[메치기]] 위주의 그래플링 [[무술]]이지만, 초기의 유도는 치기와 차기를 모두 허용할 정도로 실전성이 높은 무술이었다.[* 유도의 호신술 [[카타]](形)는 [[https://youtu.be/q9SfzhSDjBw|당신기(当て身, 아테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유도 호신술 [[카타]]에 관한 서적의 주요 저자는 [[아이키도]]계의 도미키 켄지 [[교수]]인데, [[아이키도]]와 [[합기도]]의 원류는 같은 [[대동류 합기유술]]이기에 [[합기도]] 수련생에게는 익숙한 연무일 것이다. 현대 [[아이키도]]에서 타격기를 보기 힘든 이유는 [[아이키도]]는 유술기와 관절기를 바탕으로 따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은 다다미 12장 크기 정도의 도장에 관원은 9명뿐인 작디 작은 유파에 불과했었다.[* 애초에 가노 지고로는 학문 쪽이 주전공이던 사람으로, 사진에서 보다시피 강골은커녕 오히려 약골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그래서 본인의 몸에 불만이 있어 호신하려고 유술 전문가를 수소문하다가 찾게 된게 부업으로 유술을 가르치는 접골원이었고, 당연히 딱히 전문도장도 아니다보니 규모도 작을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러 도장을 섭렵하면서 기술들을 조합해 유도를 창시한 것.] 초창기에는 천신진양류 유술 [[도장]]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었다. 강도관 유술은 후에 [[일본]] 전역에 유명세를 떨친뒤 규모가 커지고 유도로 이름이 바뀐다. 가노 지고로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흡수한다는 철학으로, 각종 유파의 유술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비인간적인 살상무술이라고 천대받던 [[가라테]]의 전수자[* 당시 가라테는 단급 제도가 없었다. 원래 오키나와의 무술이었지만 가노 지고로의 도움으로 유도에 편입 비슷한 형태로 일본에 진출하여 유도식 도복과, 띠, 단급 제도를 받아들인다.]를 직접 도장으로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거기다 다른 유파에서는 [[비급]]에 해당하는 술기를 지도 과정의 앞부분에 전진배치하는 '''파격적인 커리큘럼'''과 '''자유대련 시스템의 도입'''[* 당시 유술은 위험한 기술들이 많아서 수련에 상당한 위험이 따르므로, 연습을 [[카타]](形)로만으로 할 수밖에 없는 유파가 많았다. 그러나 가노 지고로는 급소 지르기 같은 위험한 기술들만 카타로 남기고, 경우에 따라서 어느 종류의 기술을 빼버리거나 동작을 제한하는 식으로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메치기와 굳히기 위주로 자유대련 시스템을 정립하였다. 당시 가노는 동양의 유학(儒學)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서양의 실리주의'도 습득했다. 이러한 배경이 가노가 합리적인 근대 유도를 창시하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으로 인하여, 유도는 각종 고류 유술을 제치고 일본 유술계를 제패한다. 허나 때문에 유도는 당시 다른 고류 유술들의 공공의 적 비슷하게 취급받기도 한다.[* 여기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888년 일본 경찰청에서 연 [[유술]] 대회에서 강도관 유술이 다른 유술을 압도해 우승하고 그 계기로 규모가 급속도로 커졌는데, 이때 다른 유파들이 손도 못 쓰고 당했던 [[필살기]]는 가노가 개발한 [[메치기]] 기술인 '허리채기(釣込腰, 츠리코미고시)'로, 유도를 배워봤으면 알겠지만 허리채기는 흰띠일 때부터 익히는 초급기술이다.] 가노는 이러한 살인무술에서 점차 실리에 맞지 않는 기술은 버리고, 여러 기술을 조합해 유도의 고유적인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곧 '유술'에서 '유도'로 이름을 고쳤다. 즉 사람 죽이는 기술에서 스포츠로 변신한 것이다.[* 이후 2차 세계대전 패전후의 미 군정기를 거치며 그나마 남아있던 당신기(타격기) 등등이 군국주의적인 색을 벗긴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여 [[종합격투기]]가 연상되는 '프로 유도' 를 제창한 몇몇 무술가들이 있었으나, 그다지 호응은 얻지 못했고 단체 설립 2년만에 미 군정의 무도 통제가 풀려 버리면서(...) 완전히 망했다.] 이런 이유로 진짜로 사람을 불구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은 계속해서 봉인한다.[* 대표적으로 버티면 무릎이 박살나고 안 버티면 뒷통수가 깨진다는 [[가위치기]]([[http://www.youtube.com/watch?v=h1KPk5-ab2w|蟹鋏(かにばさみ, 카니바사미).]])가 있다. 가위치기는 제대로 들어가면 무릎뿐만이 아니라 발목도 작살낼 수 있다. 이래저래 사람을 불구로 만드는 기술. 게다가 기술의 특징상 두 다리를 모두 봉인해버리기 때문에 되치기를 아예 할 수 없고, 거기에다 한쪽 팔도 봉인하기 때문에 허리를 틀어서 한판만은 면하는 방법이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한판승이 안 나오기가 어려운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부상을 입을 확률이 낮았다 해도 기술 자체가 승리를 거의 보장해주는 기술이기 때문에, 만약 이 기술이 지금도 여전히 허용되었다면 너도 나도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이 기술을 남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경기의 질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유도 정신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위치기로 넘기면 한판으로 인정하지 않도록 룰을 개정하면 되지 않냐?" 라는 의견과 "가위치기를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힐 목적으로 사용할 거라는 생각은 안해봤냐?"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가위치기가 강한 이유는 기술 그 자체가 엄청난 필살기여서가 아니라 현 유도 규칙상 파훼할 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유도와 룰이 달라 양다리가 걸려도 그라운드로 넘어가면 그만인 MMA나 삼보 등에선 이렇다 할 부상 예시도 없고 딱히 이 기술에 걸렸다고 승패가 결정나지도 않는다.] 가노는 1909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었고, 유도는 [[1964 도쿄 올림픽]]에서 처음 [[올림픽]] 종목으로 실시되었고[* 당시엔 시범종목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종목이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는 퇴출되었다가 [[1972 뮌헨 올림픽]] 때부턴 붙박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