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유대인 (문단 편집) === [[홀로코스트]] === ||[[파일:external/f.tqn.com/yellowstar.jpg|width=100%]]|| || [[나치 독일]] 당시 유대인이 옷에 달아야 했던 노란 별. || 20세기 초중반에 걸친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과 포그롬의 연장선상인[* 러시아 제국은 사회적 소수자인 유대인들을 사회적 희생양으로 삼았는데 심지어 [[러시아 혁명]] 때에는 [[시온 의정서]]를 날조하여 '혁명 세력의 배후에 세계지배를 노리는 유대인들이 있다' 라고 퍼뜨렸다. 그 [[시온 의정서]]를 유럽에 퍼뜨린 이들도 러시아 출신의 반혁명 망명자들이었다. 히틀러에게 시온 의정서 등을 전수한 인물도 러시아 출신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였다. 또한 나치가 선전한 [[피의 중상]] 또한 러시아 제국에서 먼저 퍼져서 포그롬이 발생한바 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여,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한 건 나치는 유대인이 수전노에 고리대금업자라는 이미지로 선전했는데 나치 집권 후 [[아인슈타인]]처럼 통찰력있는 사람을 빼면[* 설마 [[나치 독일|나치]]가 그 정도로 악랄할까, 설마 나치가 전쟁을 벌일까, 설마 나치가 [[폴란드 침공|폴란드와]] [[프랑스 침공|프랑스를]] 각각 한 달 만에 처바르고 점령할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상황을 낙관하다 변고를 당한 사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안네 프랑크]] 가족이다.], 나머지 유대인들은 남아서 다 수용소로 끌려갔다. 20세기초 [[영국]]은 [[시온주의]]의 대두를 지켜보고 유대인들에게 영국령 우간다 땅을 내줄 테니 거기서 나라 만들라고 제안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영국령 우간다 계획]] 참고.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도 [[유대인 자치주]]를 만들어 유대인 이민을 유치하려고 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이 경험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공통된 아이덴티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위 문서에서도 설명되었듯이, 수백 수천 년간 세계를 떠돌면서 유대인들은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었고, 그 다양한 분파의 일원들은 서로를 닭 소보듯이 하며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아예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카를 마르크스|유럽에서]], [[펠릭스 멘델스존|활약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유대인의]] [[슈테판 츠바이크|면면을]] [[바뤼흐 스피노자|보자]]. 혈통 외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업적의 차이가 아니라, 철학적인 지향점이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시당초 홀로코스트는 [[제국주의]]에서 없어선 안 될 방해파와 장애물 숙청, 제거의 목적이 있는 한 현상이고 이에 [[총통]]의 정신나간 사상이 결합되어 유대인이 목표가 된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테오도르 헤르츨]] 같은 이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통해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주장했지만, 유럽 사회에서 성공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왜?" 라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본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유대인이라는 핸디캡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השכלה)[* [[히브리어]]로 [[지혜]]라는 뜻으로, 유대 문화의 부활을 추구하는 동시에, 유대인의 주류사회로의 융화를 추구하는 지적 운동이었다.]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모제스 멘델스존[* 유명한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조부였다.]의 후손들은 은행업, 면직산업, 음악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으며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 대부터는 '''아예 전부 기독교로 개종했다.''' 실제로 19세기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공직, 교직, 군입대가 허용되는 등 유대인 차별 정책이 하나둘 철폐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고위직 장교와 [[고위공무원|고위직 공무원]]까지 허용되는 등 유대인이 진정으로 독일 [[국민]]의 일원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 전통이 약해지고 유대교를 배교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만 쓸 줄 알고 [[이디시어]]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하는 등 유대인들 역시 여기에 발맞춰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착실히 편입되어 가고있던 중이었다. 거기다가 같은 유대인임에도 가난한 동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을 깔보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는 덤이었다.[* 1920년대 독일의 유대계 신문을 보면 "요즘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하레디|검은 모자쓰고 수염기른 애들]]이 자꾸 건너 오는데 걔네들 때문에 쪽팔려서 못 살겠다" 라는 투의 기사들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해서 종교 개종, 사회적 성공의 여부와 상관 없이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었으니 유대인들 입장에선 큰 충격이었다.[* 물론 나치들도 사람인지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을 살려주거나 뒷돈을 받고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상관이자 상부에 히틀러의 [[철십자 훈장]] 수훈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증위의 경우 가족들과 함께 재산까지 챙겨서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해줬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남이가" 내지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식의 공통된 유대인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아이덴티티]]가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다[* 즉,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한 이후부터 홀로코스트 이전까지의 시기, 유럽의 유대인들 상당수는 자신들이 유대인인 '''동시에''' 거주 국가의 국민이라고 인식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의 노력을 통한 성공으로 그런 차별을 뛰어넘어 자신의 입지를 갖출 수 있으며, 그 길이 유태인의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시온주의]]적 노선보다 더 쉽고 합리적, 효율적으로 유대인의 입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다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으로 인하여 이러한 노력들은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근대 국가 내에서 비주류 집단이 아무리 순응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주류 집단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타적인 태도로 폭력을 휘두르겠다고 작정해버리면 비주류 집단으로써는 이것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은 유대인에 의한 민족 국가를 만드는 것 뿐' 이며, 자신들의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누리는 안전과 번영이란 그 나라의 주류가 '인정해 주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불안한 것'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19세기~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별 인기 없던 시오니즘 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탄생한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대외정책(대 중동 정책)에 비타협적인 배타주의의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지게 하는 일종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전간기 시절 반유대주의의 기승으로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은 남거나 도망치거나 했는데,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나치의 유대인 추방 정책이 홀로코스트로 선회하게 되면서 남아있는 대부분이 [[홀로코스트]]로 살해당했다. 1939년 전 소련에 거주하거나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획득한 지역에 거주한 유대인 300만 중 절반 가량은 소련군을 따라 도피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독일군과 그 부역자들에게 살해되었다. 미주 지역으로 도망친 유대인들은 주로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위주로 도망쳤다. 심지어는 중국으로 도망친 유대인도 있는데 중국으로 도망친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하얼빈]]이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이주 후 [[상하이]]를 거쳐 미국 등으로 망명했다. [[일본 제국]]은 상하이로 도망친 유대인 2만여 명을 상하이 게토[* 공식 명칭은 무국적난민한정지구(無國籍難民限定地區)이다.]에 가두었는데, 이 유대인들은 동유럽의 게토와 달리 대부분이 살아남았지만 역시 열악한 생활조건으로 고통을 겪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