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유대인 (문단 편집) === 헬레니즘 제국~로마 제국 시기 === 이후 [[헬레니즘 제국]]을 거치면서 유대인 인구 상당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알렉산드리아]]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고 예루살렘 근교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마카베오 반란을 일으켜 잠시 [[하스몬 왕조]]를 세우기도 한다. 헬레니즘 제국 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도회지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각 기록에 의하면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갈라티아, 에페소스, 테살로니카 등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단에게 전도하는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며 이스라엘 본토에서는 [[아람어]]가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에서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람어는 중동에서 주요 교역 언어였으며 코이네 그리스어는 지중해 동부의 주요 공용어이기도 했다.] 하스몬 왕조의 [[패권주의|패권정책]] 때문에 [[모압]], [[암몬]], [[에돔]], [[갈릴래아]] 인들이 반강제로 유대교로 개종되었고,[* [[헤롯 대왕]]도 본래 에돔인이었다가 이때 유대교로 개종한 가문이고, 예수와 12사도들이 갈릴래아인인 것으로 볼때 그들도 사실 이 때 강제 개종된 가문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적지 않은 그리스계 이주민들도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에 매력을 느끼고 새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유대교 사회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혹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여러 의견이 갈라졌다. 특히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페니키아인들 중에서 과거 자신들이 믿던 바알이나 타니트가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실망감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로마에 의해 합병되어 서기의 기점(실제 연도는 역산상의 오류로 조금 차이가 있지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기에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다. 예수를 처형할 때 예수에게 붙은 죄목 역시 명목상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체제 책동(반역)'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로마에 대해 독립을 요구하는 자주세력과 로마에 협력하는 기득권층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는 기득권층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예수는 그 추종세력을 정치적으로 이끌기를 바라던 독립파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뜬구름 잡는(?) 회개와 구원 이야기만을 주야장천 주장했으므로 고발 당시 독립파의 옹호도 얻지 못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당시 유대인 사회 내에서 독립에 관하여 사회적 갈등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술한 유대교 사회의 문화적 갈등 요인도 없지 않았다. 예수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를 상대로 독립전쟁인 [[유대-로마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고, 살아남은 유대인 저항군은 마지막 보루였던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하다가 [[로마군]]이 총공세를 펼치자 함락위기에 몰려 [[독립군]] 전원이 자결하였다.[* 마사다가 방어가 잘되는 지역에 위치했던지라 로마군은 함락시킬 때까지 고생했다.] 이후 기원후 135년에 유대인이 벌인 두 번째 대규모 반로마 전쟁인 [[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이 바르 코크바의 난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는 40만 명이나 되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가 투입한 병력도 12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로마군에 의해 58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1035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군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나가는 등 바르 코크바의 난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더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할 것.[[http://blog.daum.net/timur122556/2849|#]]]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던 기원후 2~3세기에 이미 로마시내 곳곳엔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가 존재했다. 초창기 기독교인 사회의 중추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이들 혹은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중추가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대인들 외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도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초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새로운 한 분파로써 시작했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부터 시작했으며, 특히 [[공용어|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 집단이 [[지중해]] 권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아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뒤를 이은 로마제국까지 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다민족국가들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지중해 문화권의 주요 종교가 되기 이전에는 비유대인에 대한 선교를 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았고 디아스포라 및 개종자들의 증가로 아람어 및 그리스어 사용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그리스인이나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도 그렇게 지중해 전역에 퍼져살았다. 고대의 지중해는 하나의 커다란 경제적 권역을 이루고 있어서 권역내에서 교류가 잦았던 점도 큰 요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후 많은 유대인이 중동이나 유럽으로 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