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기(금속) (문단 편집) == 특성 == [[한반도]]에서는 흔히 고급 식기를 만들었으며 이것을 놋그릇이라고 한다. 8세기[* 참고로 [[발해]]는 [[철(원소)|철]]제품이 유명했다고 한다.] [[신라]] 때부터 유기를 만드는 국가의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고,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정창원 신라 유기접시]], [[정창원 신라 숟가락]]). 아직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이라 사람들은 금속제 그릇을 많이 사용했고 [[안압지]] 등에서 유물도 많이 나왔다. [[고려시대]]에는 그 기술이 더욱더 발전하여 얇고 광택이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때의 한국산 유기제품은 외국에 신라동, 고려동이라 해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배계급의 그릇이 [[청자]], [[백자]] 등 자기로 바뀌게 되어 상대적으로 시장 점유율이 떨어졌으나, 조선 후기 [[광업]]의 발달로 인해 [[구리(원소)|원자재]] 공급이 용이해지면서 18세기에 이르러 대세가 되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경기도 [[안성시|안성]]에 유기를 주문 생산케 하였는데, 안성에서 제작된 유기는 형태나 기능이 월등히 뛰어나 사대부들의 마음을 흡족케 했고, 그로 인해 '''"안성맞춤"'''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유기장 역시 한양보다 갑절 이상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유기' 하면 안성을 떠올리게 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외에도 [[정읍시|정주]]와 [[김천시|김천]]·[[함양군|함양]]은 방짜, [[순천시|순천]]은 방짜와 주물의 중간 형태인 반방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안성은 주물 유기가 유명. 이후로도 유기장은 전통적인 금속공예기술로서 지역별로 독특한 양상으로 발전하였고, 실용성이 높은 고유의 공예품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방짜 방식으로는 경북 [[문경시|문경]]의 이봉주 선생, 주물 방식으로는 경기 안성의 김수영 선생, 반방짜 방식으로는 전남 [[보성군|보성]]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555|윤재덕]] 선생 등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흔히 사용되던 식기류였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금속공출로 많이 사라졌고[* 80대 이상인 노인들은 놋그릇 공출을 기억한다. 다만 [[1938년]]~[[1945년]]생은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에 이뤄졌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소수 있다.] 60년대 이후 [[플라스틱]], [[양은]],[* 본래 구리에 아연과 니켈이 들어간 합금이지만, 양은냄비라 불리는 냄비는 [[알루미늄]]제이다.] [[스테인리스]] 등 새로운 재질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일설에는 [[연탄]]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유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하는데, 유기그릇이 [[일산화탄소|연탄가스]]에 산화돼 변색되고 '''[[녹]]'''이 스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탓이라 한다. 연탄이 아니라도, 전통식대로 만든 유기는 잘 닦고 밀폐 보관하지 않으면 금새 표면에 산화(녹)가 일어나고 변색되는 게 가장 문제라서, 일상용 식기로 쓰기에는 손이 많이 가는 재질이다. 때문에 집안일할 사람이 적은 현대사회의 [[핵가족]] 가정에는 안 맞는 면이 있다. 어쨌든 20곳이 넘던 안성의 유기공방도 현재는 김수영 유기장 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가 운영하는 안성마춤유기공방[* 맞춤법상 안성맞춤이 맞지만, 상표인지 안성마춤으로 되었다.]만 남았다.[* 안성공단 내에 위치하는데 판매장과 더불어 유기박물관도 같이 있다. 1층은 유기 제작과정을 모형으로 소개하는 체험관, 2~3층은 반상기 등 각종 그릇과 [[종묘제례]] 때 [[왕]]이 손을 씻는 관세이를 비롯한 제기 등을 소개하는 전시실이다. 청동기, 도자기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그나마 근래에는 부엌에서 연탄의 사용도 거의 없어졌고 유기의 항균 기능이나 미네랄 방출 등이 주목받아 조금씩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해외 시장 개척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납청유기(방짜)로는 이봉주 명예보유자 및 그의 아들인 이형근 유기장 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의 공방이 경북 문경에 있으며, 대구 팔공산에 유기박물관을 운영중이다. '유기'의 예전 한자음은 '투기'였다. 한자 鍮(놋쇠 유)는 [[반절]]이 託侯切(광운), 他侯切(운회)로 "투"에 해당된다. 현대 중국어로도 tōu(터우)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듀", [[정조(조선)|정조]] 대에 출간된 전운옥편에는 "투"로 나온다. 그러나 1918년 간행된 초학요선에는 '놋쇠 유'로 나와 있고 1920년대 이후의 신문자료에서도 '유기'로 표기하여 음이 달라졌다. 이렇게 된 까닭은 [[형성자]]의 성부에 해당되는 우측의 兪(유) 때문에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http://www.korean.go.kr/nkview/nklife/1992_2/2_10.html|출처]]. 1933년 기사를 보면 '유기'라는 발음이 현대음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한글 철자법 신철자편람의 해설 > 둘째, 현대어음을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실제적 구음과 아주 틀리는 역사적 어음을 쓸 필요가 없다...(중략)... 한자음에 이르러서도 소위 자전에 쓰인대로 쓴다 하여 소(小)를 쇼로, 천(天)을 텬으로, 인쇄(印刷)를 인솰로, '''유기(鍮器)를 투기로 쓰는''' 따위다. 이것이 얼마나 현대어음에 어기어진 것인가. (출처: 1933년 4월 4일 동아일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