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한당유학 === [[초한전쟁]] 이후 무너진 권위를 다잡기 위해 [[한고조]]는 [[숙손통]]를 위시로 한 유학자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주류 학문은 아니었고 소하나 문경지치에서 알수 있듣이 실제론 법가와 도가의 복합적 사상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허나 [[한무제]]의 후원으로 서서히 중용되기 시작되었고 후한 광무제에 이르러서야 법가와 도가를 밀어내고 주류 학문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한고조에 의해서 유학이 중용 받았던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가를 경영하는 수단의 일부로서만 중용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한고조는 유생을 모욕하는걸 좋아할 정도로 매우 싫어하던 편이나 옳다고 생각되면 설령 원수라도 포용할 수 있던 한고조의 유화적 통치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한이 진의 후계자로써 진의 통치 체계를 계승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실제로 흔히 유교가 지배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한무제]] 시대, 아니 이후의 [[후한]] 시대까지 하더라도 법가의 유풍은 계속해서 강하게 남아 있었다.[* 재밌게도 유학자들을 중용했던 한무제야말로 유학적으로 좋은 통치자라고 빈말로도 하기 어려운 인물이고, 오히려 법가에 더 가깝다.] 한편 한나라 시대에는 [[훈고학]]이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정책과 항우의 함양 방화로 인해 많은 문헌이 파괴되고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필사본이나 암기를 통한 구전으로 퍼져있는 유교 경전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암송에 의해 정리된 경전을 금문경전, 필사본 및 분서당시 숨겨놓은 원본[* 글자체를 기준으로 한대와 진대의 경전을 구분했다.]의 발굴로 인해 정리된 것이 훈고경전이었다. 이 둘은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당시에 주류를 차지한 것은 금문이었다. 그러나 후의 대세가 된 것은 고문이며, 금문경전은 『춘추』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것은 [[고문학]]과 [[금문학]]을 참조.[* 덕분에 고대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이때부터 원시적인 자전도 나왔다.] [[훈고학]]은 사실상 동양권 [[서지학]]의 뿌리라고 인식되는 학문이며,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증학]]과 유사점이 많아, 서지적 연구가 중시되는 [[훈고학]]과 [[고증학]]을 한데 묶어서 '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법제 등의 차원에서는 진을 많이 계승했으나, 한 초의 과진론[* 진의 과실을 논하는 담론]이 활발히 전개됨으로서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는 [[법가]] 통치의 대안으로 유가적인 통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법에 의한 철저한 지방 통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호족]] 세력이 유학을 학습하고 향거리선제 등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는 황제권 - 법가와 신권 - 유가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왕망]]은 오히려 근본주의적인 유교를 도입하여 호족을 억누르려 했으나 철저히 실패하고,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들어선 후한 정권은 이들을 거스르는 통치를 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며 법가적 통치에 유가적 질서가 포용되는 상황이 [[한무제]] 때 [[동중서]]의 유교 확립을 통해서 서서히 유가적 명분이 법가적 도구를 통해 실현되는 상황으로 전환된다. 특히 전한 시대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가는 기(氣) 철학, 천재지변을 왕의 통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파악하는 천인상관설(재이설), [[음양]][[오행]]설 등을 받아들여 사상의 폭을 넓혀나간다. 한이 멸망하며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며 이민족의 중국 유입과 혼란한 사회상,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막부]] 체제의 형성 등으로 정적인 사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진 유교는 쇠퇴하였다. 대신 그 자리는 [[불교]]와 [[도교]]가 차지했으며, [[화엄종]], [[천태종]], [[현학]] 등의 철학적 발전은 후에 [[성리학]]에서도 받아들일 정도로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당나라는 유교를 관학으로 삼아 [[과거제]]를 정비하고 유학자 공영달을 시켜 [[오경]]의 해석들을 집대성한 유학 참고서 <오경정의>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강력한 해설서는 역으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을 불렀고 결국 학문의 본격적인 발전을 막아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다가, 위진남북조의 영향을 이어받은 당나라 대는 다양한 생각이 제한없이 넘나들던 시대로 [[불교]]와 [[도교]]가 함께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에는 외래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감으로 인해 [[불교]]가 회창폐불 등의 사상 탄압을 당하고, [[노자]]의 본성이 이(李) 씨라는 점과 당의 국성이 이(李) 씨라는 점에서 [[도교]]를 많이 지원해주었던 당 황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로인해 당나라 후기부터는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한유]], [[이고(동음이의어)#당나라의 학자|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 어쨌거나 이래서 당나라 유학은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후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의 [[성균관]]의 경우엔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당은 육조(六朝)의 천박하고 겉만 화려한 기풍을 이어받아 경서로써 인재를 선발하였지만 사실은 시(詩)와 문(文)으로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 열중하였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라고 노골적으로 당나라 유학을 비난한다.[[https://www.skk.or.kr/skin/sub_page.php?page_idx=5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