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춘추시대]] ==== 유교는 다른 학파보다 더 [[중국]]의 이전 시대의 역사 전통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태도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공자가 패자들이 날뛰는 [[춘추시대]]에 살면서 [[주나라]]의 이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려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이 때 공자가 제시한 원칙이 바로 '''정명(正名)'''이었다. 그리고 공자 스스로는 춘추를 통해 주 귀족들의 파행적 행태를 지적하면서 자기 직분의 훼손을 지탄하고, 주 대에 형성된 천하 질서[* 공자 스스로는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받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즉 왕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제후들은 이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의 수호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왕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제후가 참람하면 지위를 깎아내려 기록하는 식이다. 이 정명 사상을 설명할 때 명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본래적 의미가 오히려 전달이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 명분이라는 말을 그냥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해야 할 원칙'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정명론을 [[서양]]의 운명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동양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쉽게 말해서 '''왕은 왕으로서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신하로서 왕을 진심으로 보좌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수직 관계적으로 닥치고 충성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왕이 불의를 자행하고, 신하가 사익에 눈이 멀어서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니 똑바로 하라는 뜻이다.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아들이면 아들답게'''[* 이와 관련된 말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며, 그냥 아비에게 두들겨맞아도 복종하라는 수준의 소리가 아니다.[* 비유긴 하지만 실제로 공자는 제자인 증자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때 그냥 가만히 두들겨 맞는걸 비판하기도 했다.] 기존의 귀족 질서가 상명하달식의 질서에 가까웠다면 공자는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 식의 의문을 제기하고 실천에 옮긴 것. (정작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는 지배자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쪽으로 변질되지만) 우리가 아는 상명하복식 유교는 순자대의 일이며 오히려 맹자는 걸왕을 몰아낸건 한 '놈' 을 처단한것이니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유교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가진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명 사상에 따라 '사람도 사람다워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이 '사람답다'는 말을 '인(仁)'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람에게 내재된 '도(道)'이다. 이 시점에서 유가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온 세상을 운행하며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바꾸어놓는 천도(天道)에서 제 역할을 찾는 [[도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유가에게도 천도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애초에 천도라는 개념 자체가 [[제자백가]]가 형성되기 이전인 [[주나라]] 시대부터 전해져온 개념이다. 주나라의 신은 천(天)이었고, 이 천이 주는 운명이자 사명을 천명(天命), 그리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바람직한 '길'을 천도(天道)라고 한다. 이 개념은 [[제자백가]] 거의 모두가 공유했다. 문제는 천이 정해준 바람직한 길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법가]] 수준에 이르면 천의 역할을 거의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유가는 도가와는 달리 천도의 실현을 개인과 개인에게 주어진 직분에게서 찾는다. 초기 유가가 도가와 달리 신비주의를 거세하고 현실 학문으로 방향을 튼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직분은 개인 스스로가 만들 수 없고, 사회가 형성되어 자기 일을 나누어 받으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는 자연히 인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되고, 내적인 인(仁)을 외부로 표현하며 형성되는 제반 사회 관계의 통칭이 '예(禮)'이다. 흔히 예를 설명하면서 단순한 '예절, 에티켓'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형성되는 거의 모든 사회 활동을 포괄하게 된다는 설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크게 어려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을 외부로 잘 실현하는 것 그 자체가 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상을 찾아내는 출구가 바로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성인군자]]의 모범이고, 이를 모방하여 익혀나가는 것, 즉 학(學)이 또다른 유가의 축이다[* 가끔 이렇게 공자가 유가의 모범을 과거에서 찾았다고 하여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이해라면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르네상스는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사상을 취합한 것이므로 이러한 설명은 부당하다. 유가 사상도 과거의 '모범적인' 기틀을 [[춘추시대]] 당시의 기준에 맞게 이용한 것이므로 유가 사상이 확립된 것은 춘추시대, 특히 공자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르네상스는 애초에 특정 시대의 특정 경향을 규정하는 용어이므로, 이로써 예를 들면서 유가의 경우와 동일시하고 유가 사상의 과거 연원성을 부정하려는 것이야말로 부당하다. 그런 식의 이해라면 [[성리학]]은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유가 사상을 취합한 것뿐이므로 유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유가는 어찌됐건 공자가 초지자(初知者), 작자(作者)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창립'한 사상계가 아니고, 공자가 종래의 시, 서, 예의 기록 및 여러 현인들과의 사상 교류에서 착안한 바로써 '확립'된 것이니, 유가의 연원이 공자 이전의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틀렸다 볼 수는 없다. 또한,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유가를 확립한 이가 공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모순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런 식의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가가 공자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한 자는 적어도 유가 내부에서는 아무도 없다. 공자 이후의 유가의 기본 인식이 바로 '유가는 공자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을 확립한 이가 바로 공자이다.'이며, 이는 맹자가 공자를 평한 말인 ' 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謂集大成) : "공자와 같은 경우를 가리켜, '모아서 크게 이루었다.' 한다." '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기 사회 직분에 맞추어 인과 예를 잘 실천하게 되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는 조화롭게 잘 운영되게 된다(和而不同). 어쨌건 이러한 유가의 이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성인]]'(聖人)이라고 하고, 공자가 자신을 [[군자]]라고 칭하면서 군자라고도 하고, 맹자 대에 [[대인]]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뭐 기타 다양한 표현이 많지만, 유교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이 된 표현은 말 그대로 '유(儒)'이다[* '공자는 공자교가 아니고 유교이므로 공자 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유가만의 주장에 가깝다. [[이슬람교]]가 '무함마드교'가 아니라고 해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가? 공자와 무함마드는 당대에 인간의 이상적인 상이 되는 '유(儒)'와 '이슬람'의 개념을 창조한 것이므로 타자에게서는 무리 없이 유교/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자로는 당장에 세계 인구 20% 이상의 '이슬람교도'들이 있다. '타자'에게는 무리 없이 무함마드가 '창시자'로 보여지겠지만, 그런 '우리가 보기에 무함마드가 창시한 것 같으니 정설로 삼자.' 식의 결론은 다분히 억압적이고 비타협적이지 않은가? '정립자', '확립자'라는 중립적인 표현도 있는데, 굳이 '창시자'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상적 상이 되는 '유(儒: 선비, 유자儒者)'와 '이슬람(신에의 복종)'의 개념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슬람교의 경우는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아 참된 이슬람의 도를 내려받은 것으로 보므로, 유가의 경우는 공자가 옛 문헌을 연구하고 당대의 유들과 교류하면서 유의 참뜻을 드러낸 것으로 보므로, 그러한 견해는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들 잘 알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창시자'라는 표현이 아주 틀려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사려 있지 못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려와는 별개로, 공자가 '유'를 새로이 정의했으므로 이는 '유'에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한 것이며, 그렇기에 유가의 시발점이며 창시자는 공자이다는 식의 견해에는 또다른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정치철학]]을 정의하기 전까지 정치철학자는 없었는가? 플라톤은 정치철학자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가? 법가는 어떠한가? 한비자가 자신의 '법' 사상을 제시하기 전에 법가는 없었는가? 법가는 한비자가 창시했는가? 상앙, 신불해, 신도는 법가가 아니고 잡가인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공자가 '유'를 정의했다고 해서 그 바로 앞과는 싹둑 단절되고 그 이후만이 '유교'이다 보는 것은 '유교'의 범위를 좀 협소하게 본 것일 수 있다. [[백이]]도 '유'이고 [[주공]]도 '유'이고 정[[자산]]도 '유'이고 유하혜도 '유'이고 심지어 [[안영]]도 '유'일 수 있다. 실제로 <<한서>> <예문지>에서는 안영이 유가로 분류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언행은 후세 유가에게, 공자 만큼은 아니지만 '유'의 모범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유가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며, 주요한 논쟁거리이다. 물론 앞의 견해처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유가이다.' 자신있게 답하고 그 '여기'를 공자로 지목하는 견해는 오늘날 일반 다수의 견해인 것 같지만, 그것은 '객관'이 아닌 '공동주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타자의 학론을 열린 자세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 본래 유([[儒]])는 [[제사]]를 치르는 사회 신분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 대에 [[종묘]]를 비롯한 시조 제사 등의 여러 제사가 확립되면서 인문주의적이고 신분 질서에 입각한 제사가 보편화되었다. 이후 유가에서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을 규정하는 말로 정의하였고, 후대에 계속해서 전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공자가 정립(正立)한 유교의 기본 교리는 '''([[유토피아]]인) [[주나라]]의 천하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직분에 따라(正名) 사람다움(仁)을 실현함으로써 예(禮)를 회복하여,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조화로운 사회(和而不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옥]] 등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유가가 도가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물론 선입견을 깨는데 이러한 비판이 중요하기는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첫 구절부터가 "배우고 또 때가 날 때마다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인 반면, [[노자]] 48장에서는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하는 것이 없는 것(무위)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고 했다. 애초에 노자 1장에서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항구적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고 하여 유가의 기본적인 정명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물론 [[노자]]의 판본 같은 경우에도 곽점묘 죽간본과 마왕퇴묘 백서본의 출토로 후대의 첨가 및 윤색이 뚜렷함이 확인되었으나, 위에서 인용한 [[노자]]의 문구는 현재 통용되는 왕필본 - 죽간본 - 백서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문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