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다른 종교, 사상과의 관계 == 흔히 사람들에게 유교는 포용적이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타 종교에 대한 탄압은 상당히 잦았다. 조선왕조 때부터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불교]]계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사상적으로 근친관계인 양명학을 비롯해 그 어떤 학문/사상/종교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른 사상은 싹이 틀 때부터 철저하게 짓밟은 반면 이미 성리학보다 앞서 존재했기에 일정 세력이 갖춰져 있던 불교는 확실히 척결하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계에서는 이미 망해버린 옛 [[고려]]의 흔적을 지우고 유림에 대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고려왕조 때까지만 해도 국교에 준하는 위치를 가지던[* 오해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교’가 아니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이른바 불교국교론은 이미 폐기된 학설이다. ] 불교를 자신들의 유교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지위강화의 목적만 있던 것이 아니라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유교를 통해 통제하려는 목적과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흡수하기 위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높은 신분과 지위를 받았던 승려들도 아예 [[신분제도]]상에서 '''천민'''으로 격하편입시킴에 따라 조선왕조 때는 승려들도 천민 신분이기 때문에 일반 천민들과 함께 막노동에 동원되거나 투입되기도 하였다.[* 일단 승려들의 공식적 신분은 정해지지 않았다. 천민취급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 하나로서 동급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허나 승려들에 대한 강제 부역이나 도첩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불이익 때문에 사실상 천민 취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조선 당시에도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 사망확률이 꽤 높았다.]. 유생들이 심심하면 절에 찾아가 승려들을 폭행하거나 살해했고, 이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교]] 및 [[도가]] 사상에 대한 탄압도 상당했다. 애초에 공자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유교를 가장 앞장서서 비판해왔던게 [[도가]] 지식인들이었으니, 유학자들 입장에서 도가 사상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조선의 경우 도가 관련 서적을 읽는 것 까지는 허용했으나, 도가에 관해 연구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문신 [[박세당]]은 [[도덕경]]에 관한 주석서를 썼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김용옥]]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무너진 지 한참이 지난 1970~80년대의 한국에도 도덕경을 금서 취급하는 분위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7-80년대 이전부터 이미 도덕경과 도가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설득력은 그다지 높진 않다. 근대 때부터 전래되어 온 [[천주교]] 등 기독교 종파들과도 갈등 관계. 특히 서양에서 건너온 이교(異敎)라고 규정하여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시절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및 [[신미양요]]까지 발발하면서 조선 유림계의 반양(反洋)과 반(反) 천주교 성향이 더욱 짙어지기도 하였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다. 일단 부인부터가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대체로 유교를 믿다가 천주교를 믿은 사람 중에선 [[정약용]]도 있다.[* 먼훗날의 이야기지만 손주들의 경우도 줄줄이 사탕으로 천주교로 개종을 하였다. 직계 6대손인 [[정해인]] 또한 천주교 신자다.] 하지만 [[어른의 사정]]과 유림들의 거센 반발 앞에 대원군도 머리를 숙였고, 그렇게 해서 병인박해 등이 일어나 많은 외국인 성직자들과 국내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반대로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덜 비판을 가하는데, 앞전에 천주교가 대책없이 유교에 도전장을 내민 덕택에 결국 유교의 문화를 따를 수 밖에 없었고 특히나 천주교와는 종교 개혁 문제로 앙숙이었다. 그래서 개신교의 경우는 천주교와 달리 조선 말엽에 중립을 지켰다. 그로 인해서 유교의 문화를 상당부분 많이 수용을 했고 실제로 유교를 따르다가 개신교로 전환한 사람들을 보게되면 이름만들어도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인지 흔히 우리나라 3대 종교인 [[불교]], [[개신교]], [[천주교]]중에 유교 문화가 가장 깊게 뿌리잡은 곳은 개신교고 그 다음이 불교다. 유교 문화의 흡수는 주로 개신교, 불교가 흡수했고. 천주교의 경우도 정약용의 영향으로 유교 사상을 흡수하긴 했으나 개신교나 불교에 비해서는 미치지 못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도 인본주의나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을 제외하면 유교와 유사점을 찾기 어렵지 않고, 불교의 경우도 위진남북조 시절 유불일치가 이미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윤회론을 제외하곤 비슷한 구석이 꽤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