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조선 후기 ===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적으로 교조화된 사회로 평가받는 성리학 천하를 달성하게 된다. 그 여파로 주자가례의 보급과 강요로 여권이 하락하거나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으며, 통치의 차원에서는 유교 학파에 따른 논쟁이 활발히 벌어져 '''[[예송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전국에서는 향약이 시행되어 유교적인 사회 통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는 서원이 설립되어 자신들의 학파를 고수하였다. 흔히 '18세기 서민 문화의 성숙'을 이전의 양반 성리학 문화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례의 보급과 제사의 수행 등 개인 혹은 향촌 사회에서 성리학의 보급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큰 진전을 보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남인은 [[경기도]] 남인인 근기학파와, [[경상도]] 남인인 영남학파로 갈라지게 된다.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운 [[중농학파]]로 토지재분배를 위한 자영농 육성을 주장했고, 영남학파는 서원과 향약을 강화하여[* 이는 이유가 간단한데, 조광조 일파가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단단히 하여 결국 사림파의 세상으로 만들었듯, 자신들도 조광조 시절의 사림들을 따라해 향약과 서원을 강화하여 훗날 남인의 세상이 되는걸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향쟁(鄕爭)이 벌어지는 것과, 사원을 남설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부터 향청을 수령이 지배하게 되어 수탈자문기구로 변하면서 구향(舊鄕)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노론 사이에서는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느냐 다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간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경기도 중심 낙론)이,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충청도 중심 호론)이 펼쳐졌다. 이를 호락논쟁이라 한다. 근데 이 논쟁의 본질은 리가 기에 제약되냐 안 되냐를 논쟁한 것이다. 말하자면 물(物)에도 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논쟁이다. 인과 물의 성(리)이 다르다는 건, 인간과 사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내재된 리도 다르다는 논리. 이것이 율곡학파의 주기론적 정통이다. 근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하면 뭐가 되었던 리는 제약되지 않고 보편적 성질을 띤다는 뜻이 된다. 인물성동론은 퇴계의 주리론적 경향을 많이 받은 사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호락논쟁은 오랑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당시엔 오랑캐는 사람 취급을 안하기에''' 물(物)에 들어가는데,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 자체는 오랑캐와 거리가 먼 이론이지만, 낙론의 논리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리가 있으니 오랑캐도 리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것이고, 호론의 논리는 오랑캐는 짐승과 같아 리가 없으니 그들의 문화를 받으면 짐승처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호론이 대세가 되어서 낙론은 정계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됐고,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운 북학파와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이 살아남아 이어진 노론 시파의 뿌리가 되었고 [* '''김조순을 비롯한 新 안동김씨가 노론이지만 시파인 이유이다.'''] 호론은 영남학파와 같이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계를 강타한 [[사회진화론]]의 대선배~~[* 다만 사회진화론과의 차이점은 사회진화론은 자신들이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나온 주장이라면 위정척사파로 이어지는 집단은 그렇지 않다.] 다만 이때 남인은 대체적으로 호론에 동의하였다. 퇴계학파의 이기호발설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인물성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차원에 가깝고. 남인의 인물성이론은 '인간에게만 오로지 리가 있고, 오랑캐에게도 사람이니 리가 있다.'는 것 정도다. 한마디로 인물성이론에서 호론과 남인의 차이는 오랑캐를 사람으로 보나 안보냐의 차이. 예를 들어 남인계 실학자 정약용의 「기예론」에서는 인물성이론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우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갑술환국 이후로 남인의 처리문제에 대해 온건한 주장을 하면서 [[송시열]]과 키배를 벌였던 윤증이 있다.[* 원래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송시열과 학문적 대립이 있었던 윤선거였으며. 윤선거의 아버지가 성혼의 제자 윤황이었기에 윤증은 율곡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우계학파인 셈이다. 물론 윤증은 송시열과 키배도 있지만 그가 윤선거의 묘갈(墓碣)을 대충대충 쓴 것 때문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 사제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여기서는 [[술이부작]] 참조바람. 참고로 윤증의 본가인 파평 윤씨는 고려시대때 지체 높은 문벌귀족이었다.] 그리고 양명학을 집대성한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가 있으며, 이것이 한말 때「유교구신론」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주장한 박은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우계학파가 양명학을 신봉하는 학파는 아니고 애초부터 성혼은 양명학과 거리가 있던 선비였지만, 양명학이 주자학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 우계학파의 전통으로 이어졌었다. 한편 [[정제두]]를 비롯한 [[소론]]학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이 명맥을 이어갔으며, 개화기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펼치면서 그 근거를 양명학에 두기도 했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고증학을 밀어주었는데, 당시 고증학은 고전 연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현실 개혁에는 정작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선 세도가문이 고증학에 치우쳐 현실 개혁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청의 고증학 자체가 서슬 퍼런 만주족 지배하의 [[문자의 옥|학문 검열 풍토]]에 말려들지 않고 회피하기 위해 한족 학자들이 택한 학문적 방법론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또한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부정한 게 아니라 고증학을 통해 성리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증학 = 실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증학이라는 것이 사실 사상이기보단 학문적인 연구 방법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고증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유행하면서 백과사전류 저서나 문헌 고증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예를 들어 한백겸의「동서지리지」는 고대 지명을 새롭게 밝히어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가 아닌 만주라고 고증했으며, 한치윤의「해동역사」는 중국부터 일본까지 540여의 서적을 참고하여 한민족과 중국 및 일본, 여진에 대한 문화 교류를 상세히 기록했고, 추사 김정희는「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히어 당시 신라의 강역을 고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