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특징 == [[공자]]는 사상적 측면에서 [[동아시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공자가 제시한 인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인간성|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이란, [[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 따르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는 것을 본 공자는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라는 외침을 한 것이었다.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된다.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공자는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였고,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또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불렀다. 즉,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자연스럽게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인과 의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는 행위가 바로 예라는 것.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공자는 이러한 개념 아래, 당시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던 것이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정치는 인을 갖추고 예에 밝은 [[군자]](君子)[* '군자' 역시 인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며, 공자의 말이 확산되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 유가는 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원시 유교에서부터 [[묵가]], [[도가]], [[법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명가(제자백가)|명가]]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 [[주자학]], 정주학(程朱學), [[양명학]]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 [[불교]]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선왕]]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바로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자세히 짚자면, 공자는 [[주나라]] 전성기의 이상적인 질서를 숭상하였고[* [[은나라]]는 점복, 식인, 순장, 인신공양 등 이른바 '[[괴력난신]]'이 보편적인 문화였는데 이를 교화한 것이 주공 단을 필두로 한 주나라였으므로 하극상이 난무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 질서가 엉망진창이었던 춘추 전국시대를 정상화할 모델로 주공 단의 주나라를 모델로 삼았던 것.] 패악질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의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사(士)'로 불리는 계층을 교육하는 데 노력했다. 흔히 이 글자의 뜻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사는 주 대의 하층 귀족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 들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들이 유입되어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무질서로 인해 이들 중에는 문적 교양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고, 공자는 이들을 교육해 바로잡으려 한 것. 공자는 단순한 부국강병이나 패도의 결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덕목들을 규정하여 후에 '유(儒)'로 불리게 된 학문적인 집단을 구축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귀족사회에서 능력주의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와 국정 경영을 위해 필요한 덕목과 실력을 교육하여, 학파에 따른 인재 육성과 등용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정확히는 [[능력주의]][* 솔직히 역사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도 유학자들보다 귀족들이 능력은 더 있었다.]라기보다 동아시아판 원시적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백성을 노동자처럼 보고 내심 귀족들보다 중시하였다.[* 중국의 유학자들은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고 귀족주의 국가들과 다른 주장들이 많았다. 중국 역시 그 영향인지 유목민 귀족들이나 그 영향으로 탄생한 귀족이 아닌 순수 [[한족]] 귀족 계층은 금방 사라지고 관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시 유교가 대세가 되자 형식적으로는 귀족이 사라졌다. 조선에서 [[양반]]은 법적인 계급이 아니라 주로 과거 귀족이었던 사람들이 스스로 차별화한 것이다.] 이러한 유가의 학문적인 성과는 유가뿐만 아니라 [[묵가]], [[법가]] 등 여러 유파의 형성이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생겨난 유가는 [[전국시대]] 말기에 정치 경영 이념으로 법가에 밀리게 되었으나, 법가를 택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2대만에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반면교사]]가 되어 이후에는 유교와 법가가 뒤섞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최초의 장기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국정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른 그 어떤 동양 사상보다 굳건히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유교가 일시적으로 쇠락해 [[불교]]와 [[도교]]에게 자리를 많이 내주었고, [[당나라]] 때까지도 사회의 중심적 지위는 불교와 도교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으나, 이들 종교들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 통치질서를 뒤바꿔놓지는 못했다. 중국에서 귀족 시대의 유교는 귀족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으나 귀족들이 전멸하면서 민중적 유교로 변하게 된다.[* 귀족이 망하지 않은 일본의 유교는 상대적으로 귀족적인 면이 강하다.] 이후 [[당나라]] 후기부터 [[송나라]] 때까지 유교와 불교적 신비주의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재해석이 일어나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조선]] 등에서 과거시험의 과목이 됨으로써 국가 이념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계속 성리학만 고집하진 않고 시대에 따라 [[양명학]], [[고증학]] 등이 대두되었으나, 과거시험 과목은 변함없이 [[성리학]]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과 [[베트남]]에도 유입되어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흐름을 통틀어 현대에는 '[[신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긴 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유교'는 '유학(儒學)', '정학(正學)', '도학(道學)' 등으로 널리 불렸고, '유교'라는 표현은 '유학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추후 20세기가 되어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례가 한정되면서 '유교'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게 되었지만, '''유교는 이러한 발전을 거쳐왔다는 면에선 우리가 흔히 논하는 종교들과는 퍽 다르다는 점은 자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유교가 [[종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실 현대에 와서는 이 유교라는 것을 종교와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부터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는 유교 자체의 가르침에는 내세에 관한 일정한 기준점이 있어서 다른 종교와 동시에 행하기는 어려운 탓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들이 유교적 제례인 [[제사]] 참여를 허용하느냐 안 허용하느냐는 식의 쟁점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주된 종교적 [[떡밥]] 가운데 하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와 어르신을 가릴 것 없이 현대인은 모두 유교를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유교는 종교이고, 종교의 정의적 관점에서도 유교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유교를 보는 시각은 어떠하였을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종교와 학문을 깔끔하게 분리하여 구분을 지으려는 현대인의 관점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유교의 경전이나 사상가들에게 대한 선비들의 태도는 종교의 경전이나 성인(聖人)에게 대한 종교인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알고리즘 교과서를 [[라면]] [[냄비받침]]대로 쓴다고 격심히 비난할 현대인은 없지만, [[논어]]를 라면 받침대로 쓰는 모습을 조선 시대 [[선비]]가 보면 난리가 날 것이다. 요컨대 과거엔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원천적으로 달랐고, 당연히 현대의 구분 기준이 과거의 그들에게 적용될 리 없다. 이는 유교 말고도 많은 고대 학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수학]]을 대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태도나 영혼을 대하는 플라톤의 논의 등 고대 철학의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종교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행동거지를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결론은 과거에도 또한 유교는 학문이자 도(道)이자 철학이자 숭상,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것. 따라서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출발점은 분명 다르나, 현대에나 과거에나 종교 그 자체, 내지는 종교 같은 것일 수는 있다 말하겠다. 더 자세한 것은 아래 9번 문단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유교를 단순히 공자 및 그를 따르는 집단의 개인주관적 철학, 혹은 단순히 과거 역사에 짙게 흘렀던 한 종교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인이 입을 모아 동의하듯,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국가제도와 법질서를 모두 포괄하는, 그 자체로 [[동아시아]]의 문명, 문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동아시아의 각국 언어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친 [[한자]]부터가 기본어휘 상당수를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서 비롯하였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 특히 [[한국]], [[베트남]], [[일본]] 역시 모두 한자를 사용했고 사용하는 나라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또한 [[조선]]의 영향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다. 한중일 3국은 개화기 이후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없던 서양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용어들의 대다수를 아예 유교경전에서 따와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사실상 생활의 모든 것이 유교에서 시작되었고 유교로 이루어졌다. '''서방에서 [[기독교]]가 끼친 영향이 역사, 문화적으로 지대하듯, 동방에서 유교가 끼친 영향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지대하다.''' 물론 19세기 서양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가 상당히 붕괴하였고, 20세기 초반에는 유교가 [[서양]]에 뒤쳐진 원인으로 지목되어 탈유교 또는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국가통치 주요 사상에서는 한 번 완전히 몰아냈던 것은 맞으나, 그럼에도 현재 멀쩡히 존재하는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순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동아시아]] 사회에 계속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이렇게까지 유교가 길게 살아남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유교가 부의 재분배, 평등을 외쳐서 사람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맥락이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유교의 공은 평분(平分 :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고 사는 간사함이라, 개인 재산이 많은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남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야 한다. 공자는 심지어 "군자는 백성의 살림이 모자라는 것보다 도리어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라"고 했다. 덕분에 유교적 성인군자들은 돈을 크게 벌었더라도 다 뿌리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유교의 가르침들이 다 이러하니 극히 최근까지도 유교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 인기가 다 날아가기는 했다. 유교가 구시대의 악습을 모조리 뒤집어 쓴 이미지가 되어 인식이 완전히 나빠졌기 때문. 물론 이는 유교 이념 자체보다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파행적 현상이 더 주목받기 때문이기는 하다. 유교를 어느정도라도 안다면 가르침부터가 다 틀려서 유교는 필요없고 쓸모없고 날려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는 [[유림]]이 [[고려시대]] 말부터 정치세력화하여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왕조 말부터 크게 쇠락하면서 대원군 실각 이후에 정치세력으로서의 구실을 거의 잃게 되었다.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 현재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한국에만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통계를 보면 10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이 실제 유교의 위세를 딱 잘라 나타내는 해석이 될 수는 없다. 유교를 서양식의 종교 개념이 아닌 생활 사상이나 정치 철학, 순수 철학 등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 즉 애초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다르다. 이는 [[불교]]와 [[도교]][* 물론 이쪽은 [[도가]]와의 관계 문제도 있긴 하지만.]가 서양식의 종교 개념으로 말미암아 빠르게 정의된 것과는 다른, 동양 사상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유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도 여전히 '유학적 삶의 형태'는 많이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학 자체의 본질이나 학문적 성격관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유학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관습과 사고가 그대로 문화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