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현대 ===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변양은 사회변혁을 온전히 감당해낼 역량을 지니지는 못했다. 공양학자들이 사회의 근간 사상을 새롭게 발기해 보려고 고심하는 사이, 서구의 사상은 급속도로 들어왔다. 중국의 서양학자들은 '''공양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나날이 더욱 격렬하고 더욱 빠르게 '문명국'이 '후진국'을 점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다. 또한 실증으로 이룩한 과학과 논리술에 바탕한 철학이야 말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중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더욱 유효했다. 이러한 상황의 영향은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신문명에도 해당한다. 그 나름대로 복잡한 전개가 있지만 공산혁명, 민주혁명도 서구 사상 전파의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젊은 시절 공양학파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차오]]같은 거목들마저 유교와 멀어지면서 유교가 국가의 기반 이념으로 존재하던 역사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제국주의를 벗어난 지금 동양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사상들을 재독하기도 한다. 서구의 문명사 사상사에 대한 이른바 유럽중심주의적 함몰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고에서이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중화민국]]에선 유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유교정신을 통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다. 장제스 본인부터 군인 출신에 여러 유교경전을 독파한 인물이었고 군벌과 서구열강의 침탈에 중국적 전통이 파괴되고 모럴헤저드와 서구적 사고로 부터의 잠식을 막기위해 중국의 전통은 유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타락한 서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중국을 지켜내려 했다. 그렇지만 결국 '''독재정권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였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국가적 정체성의 확립이 불가능 했고 결국 대만으로 쫓겨나 아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공자 가문의 직계 후손 [[쿵더청]]을 [[국부천대]] 때 데려가서 미약하나마 유교적 전통을 잇는 중이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자로서 자신이 갖고있는 [[마오주의|공산주의의 변형]]을 공산중국에 탑재하려 했다. 농민을 국가의 주체로 보고 농촌 커뮤니티의 발전이 곧 국가적 성장으로 본 모택동주의는 전통적 유교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듯 했지만 그렇게 해서 벌인 [[대약진 운동]] 이 몇천만의 아사로 종결되어 마오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후에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한 [[문화대혁명]]이 벌어지자 [[홍위병]]들은 공산주의를 방해할 만한 전통을 없애야 한다며 공자묘를 파괴하고 유교경전을 불태운 뒤([[비림비공운동]]) 나이가 적고 많음을 떠나 반동으로 몰린 인물들을 죽이거나, 죽을만큼 모욕을 줘 중국의 전통은 크게 훼손됐고 유교적 정신가치도 그에 따라 파괴되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수단으로 유교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그러나 수십년전 파괴된 유적과 같이, 유교는 더 이상 중국인들의 이념 속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이념, 사회적으로 중국에서는 완전히 파괴된 문화이면서, 동시에 중국에서 발생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대한 이념 체계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발전을 이룬 다음에는 이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충족을 이루었기에 관념적인 부분에서의 발달을 촉구하는 것. 하지만 오랜기간 쇠퇴하여 왔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방문해 유교를 연구하기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