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청대 유학 === 청나라는 왕조 초기부터 정통 주자학을 강조하며 청나라 황실은 유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민족이건 한족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핵심인 유교 정신에 누가 더 가깝냐 만주족이 세운 왕조이긴 하지만 '''한족보다도 훨씬 유교와 학문에 밝으면''' 우리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청나라에서는 양명학과 같이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학문을 이단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곧 정부의 기틀이 잡히면서 [[문자의 옥]]이란 사상탄압 정책이 이어지며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에 대한 담론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며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고증학]]은 이기론의 성리학과 심즉리설의 양명학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집착한다는 점을 공격하며, 고전을 꼼꼼이 연구하여 '실사구시'와 '경세치용'를 구현하고자 한 학문이다.[*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라는 측면은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워 많은 현실 개혁안을 내놓았다. 극단적으론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도 존재했다. 고증학 연구가 진척되는 동시에 문자옥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며 결국 가장 데미지를 입던 건 송나라 시대부터 줄곧 중화의 주류사상으로 기능했던 [[성리학]]이었다. [[양명학]]이 사상적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아예 사실판단에서부터 성리학의 각을 떴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이런 송대 유학의 형이상학적인 경향을 도교·불교의 테이스트가 섞인 변종으로 간주하는 흐름이 성장하며 건륭제 즈음엔 경전 자체를 중시하는 한대 유학이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고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측면은 '''검증에만 매달릴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다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고증학이 실용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데에 반해, 한편으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공존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학을 관학 삼은지 2000년이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닦아진 유교의 헤게모니가 보통 공고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책을 펴거나 사상을 주장하려면 옛 성인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채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사구시나 경세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결국 주자보다 끗발 좋은 성현의 말씀을 찾아 옛 경전과 경전의 업데이트 기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또 현실과는 자연히 멀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증학 연구가 본질적으로 [[문자의 옥]]이라는 희대의 학술 탄압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생각할 여지도 있다. 즉 고증학 자체가 정치적 요인으로 발달했다는 주장. 이에 따르면, 옹정제 때부터 슬슬 심해지더니 [[건륭제]] 시기엔 청나라를 입에 올리기만 하면 목이 날아날 지경에 달하면서 청나라 학자들은 아예 당대의 이슈에는 학을 떼고 손도 대지 않게 되면서, 자연히 청대와 아예 엮일 일 없는 고대 기록이나 평론하는 [[자기위로]]적 학문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결국 성리학을 반박해놓고 정작 대안이 될 참신하고 깊은 내용은 제시하지 않은 채 외려 옛날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반동]]적 악순환이 나타나는 진짜 이유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청 후기에는 드디어 유학의 마지막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공양학]]이 등장했다. 청 대의 고증학이 형식에 치우치며 고증에만 치빠져 현실과 동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공양학]]이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일 것이다. 이제껏 중국이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재 청 왕조도 오랑캐 왕조고, 오랑캐가 힘이 강하다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은 이제까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 지금까지는 설사 창칼로는 지더라도 기술 문물로 미개한 오랑캐들을 압도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신 승리 체계를 짜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들의 [[산업혁명|기술문명은 중화문명의 기술문명을 압도했고,]]'''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사상적인 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이 기술문명에 대한 선망이었지, 실질은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항기의 비극적 역사이다. 이 맥락에서 조금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추적이 생사의 문제가 되었으니, 자극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기술 문명의 기원으로서 서양 사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점점더 제국주의 압박은 강해지기만 하여왔고,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진 오랑캐로 폄하하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존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자, 기존 사회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이치의 사회적 효용이 크게 공격당하게 된다. 이에 공양학파는 성리학과 같은 기존 학설들을 과감하고도 거부한 후, 유교의 뿌리인 공자의 흔적을 더듬어 '춘추공양전'을 더듬어냈다. 그들은 춘추공양전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설을 수립,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양학파의 시절까지도 유교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을 만큼 유교는 중국 사상의 근간이었다. 중세의 신학에 비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반대해서 '중학위체, 서학위용'을 제시한 자강파 장지동의 사상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던 조선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동도서기론이 이 계통이다. 그런데 '중학위체, 서학위용'은 사실 조리가 맞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에서 사용되는 체와 용의 개념은 단일한 실재의 상호 관련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적인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서양의 학문을 단순한 도구라고 헐뜯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