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성리학]] ==== 이후 [[태극]], 이[* 理, 본래 불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나 많은 중국식 불교 용어가 그러하듯 본래 중국에 존재하는 단어나 개념 등을 차용한 사례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교 측에서 역수입이 가능했다.] 등의 개념을 받아들여 기(氣)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성리학]]의 조류가 당 후기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송나라]] 대의 [[주자(철학자)|주희]](후에 주자라 불림)가 종합하여 성리학을 완성했다(이 때문에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 성리학은 정주학,[* 뒤의 주자는 주희, 즉 흔히 알려져 있는 주자를 가리키고, 앞의 정자는 이정(二程), 즉 주희보다 선대의 성리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킨다.] 신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모습(이기론, 심성론)은 이때 다 만들어졌다. 이전까지의 유교는 현실적 도덕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매우 상식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것으로는 사후세계나 인간의 지각, 영혼, 형이상,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불교]]와 [[도교]]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그네들의 방대한 [[우주론]]과 개인적인 심성론을 흡수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성리학과 양명학 같은 흐름을 현대에는 [[신유학]]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주자학]]은 '리'를 형이상으로 치고 '기', 그러니까 대강 뭉뚱그려 말하면 사람의 기질이나 마음을 형이하로 간주했다.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사이에 선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형이상 쪽은 순전한 선이며, 형이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재언하면, '리'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 절대선이며 개개인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악하고 방종해지는 이유는 '리'라는 불변의 보석이 진흙 속에 묻힌 것처럼 형이하학적이고 동요되기 쉬운 기질이나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선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내재된 '리'를 밝혀내야 한다. 왜 이게 가능한가? 주자에게 있어 '리'라는 것은 불변하는 천성적 선으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에 다 깃들어 있는 일종의 '''절대이치'''이기 때문이다. '리'가 나무에 깃들어 나무의 '리'가 발현되어 나무라는 실재 사물, 그러니까 기로 형성이 되고, 기왓장의 '리'는 기왓장에 깃들어 기왓장이라는 실재 사물이 나타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가 깃들어 하나의 인간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리'라는 건 조약돌에 깃들어 있는 '리'도, 풀때기에 깃들어 있는 '리'도,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리도 다 똑같은 '리'다. 모든 사물에 깃든 '리'가 똑같지만 사물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그 '리'가 형이하학의 기로.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모두 동일하다. 여러 사물들에 차이가 있는 건 '리'가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개체마다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건 그 개체마다의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리'는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학문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깊이 살펴서, 그러니까 격물함으로, 그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파악한다. 한 사물의 '리'를 파악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마당의 대나무의 '리'를 파악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리'를 파악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리'를 다 파악하면 어느새 치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결코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고, 될때까지 차근차근 모든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파악해야 된다! [[주자(철학자)|주자]]는 이를 위한 수련방법으로 격물치지를 천명했다. 물론 주자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경전에 있는 말이다. 즉 악의적으로 말하면 주자가 일종의 견강부회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격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해서, 치지,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얘기이다.[* 흥미롭게도 '과학'이란 말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science의 다른 번역어로 '격물학'이라는 말과 경쟁했다. 승리한 말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성리학]]은 기존의 소박한 유교에 [[불교]]의 세계관과 [[도교]]의 음양사상에 영향을 받아 우주론적 해석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자는 사서집주를 만들면서 사실상 사서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공자]]의 유교와 [[주자(철학자)|주자]]의 성리학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일정한 간극을 두고 보아야 하는 점은 이 때문. [[원나라]] 대에는 일시적으로 유학자들이 천대받으면서 쇠퇴하였으나[* [[원나라]]는 신분제를 인종따라, 직업따라 나뉘었는데 남송인이 가장 천대받았으며, 그 중에 성리학자는 완전히 천 취급이었다. 허나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 중심으로만 이 정책이 유지되었을 뿐이지 중국 전역에 이 정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몽골 제국]]은 정복은 해도 다스리지는 못하는 제국이었다.] 원 말에는 중단되었던 과거를 재시행하는 등 [[성리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로, [[충선왕]]이 원의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안향]]이 [[원나라]]에 유학을 가면서 들여온 것이다. 이후 [[성리학]]은 [[사대부]] 계층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청시대에도 관학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다만 과거가 장기화되고 명청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경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양식이 완전히 고정되었는데 이를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국의 이념은 한층 통일되었고 신사 계층이 확고해졌으나, 과거의 형식화를 불러오는 폐해를 낳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