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개요 == 유교([[儒]][[敎]])는 [[춘추시대]]에 태동한 [[철학사/동양|동양철학]]의 일종[*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 [[도교]]와 함께 [[종교]]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받드는 신이 없다는 점과 교의 [[창시자]]를 [[신]]의 [[대리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세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고 현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을 들어서 현대에는 [[종교]]로 보는 시각보다는 [[철학]]으로 보는 시각이 더 강하다.]으로써 [[동양]]의 [[철학]]을 지탱하는 [[삼교|동양삼교]]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처음 등장했던 [[춘추시대]]에 [[부국강병]]을 꿈꾸는 지배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자 등장한 [[제자백가]] 중의 하나로써 등장했는데, 당시에는 [[법가]], [[도가]]와 함께 가장 잘나가는 가르침 중 하나였다. [[도가]]가 일반 백성들에게나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당시 유교와 경쟁을 하던 최고의 가르침은 [[법가]]였고, 법가를 따르던 [[진시황]]이 결국 [[진(영성)|진나라]]로써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곧 다시 [[후초|분열]]하고 유교를 받아들인 [[한고조]] 유방이 최초의 유교제국 [[한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민간사상으로써 성공한 [[도가]]의 [[도교]]와 함께 [[제자백가]]의 가([[家]])에서 벗어나 교([[敎]])의 칭호를 받고 동양 핵심 이념 중 하나로써 발돋움한다. 당시 [[제자백가]] 중 가장 현실주의적이었던 법가를 누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법가가 '''세계 최초의 [[법치주의]]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을 성공했으나,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발생되기 전의 시대[* 바로 옆 [[한민족|민족]]이 [[홍익인간]]의 개념을 만들어서 [[천부인권]]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이 한참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섰을 때, 중앙집권체제의 고대왕국을 설립하지 못한 상태로써 [[제자백가]]가 만들어낸 문물을 수용하지 못하였다.]로써 시대적 한계로 [[공익]]이란 개념을 담지 못했고, 더 나아가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군주와 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는 개념인 [[헌법|헌정]]이란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법가를 이용해서 [[진시황]]이 중국 최초로 세운 [[중화제국]]인 진나라가 [[내전|사분오열]]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배층을 통제할 수 없다는 약점을 시대적 한계로 유교에게 자리를 주고 사라졌지만 유교가 법가적 행정원리를 흡수하게 만들어서 훗날 유교국가들이 고도의 관료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법가를 흡수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일 뿐, 사실 법가만 흡수한 것도 아니다. [[유가]]가 [[법가]]를 상대로 승리하고 고대 [[유교]]를 성립하기 전부터 [[농가]][* 유교의 핵심 경제정책인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개념을 가진 것은 농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도가]][* 훗날 [[유학자]]들이 받아들인 [[풍수지리]]설은 [[도가]]의 [[도교]]에서 넘어온 개념이다.], [[음양가]][* 동양 역사에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설명할때, 나라가 오행 중 하나의 성질을 띄고 있어서 그 기운이 쇠하였다라고 하는 사상의 근원이 음양가에서 넘어왔다.] 등의 다른 가르침을 융통성있게 흡수해 왔으며, 고대 유교가 성립하여 [[훈고학]]이 자리매김한 후에도 [[불교]]나 [[도교]]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했다. 유교가 다른 학문들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근본적 성격이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유교는 상당히 포용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이 비타협적이고 이기적인 학문이 된 원인 중 하나로 도교적 가치관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라는 설이 있다.] 덕분에 유교는 [[자연과학]]을 제외한 광범위한 분야를 망라한 거대한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유교세계를 침략하는 19세기 초까지도 [[동아시아]]의 [[정치]]. [[제도]], [[이념]], [[가치관]] 등에 넓게 걸쳐서 모든 분야의 근간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증흥하던 유교는 서구 열강이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복합적으로 발전시킨 [[철학사/서양|서양철학]], [[종교]], [[제도]], [[이념]] 등에 밀려서 도태되었으며, 결국 1897년에,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유교 정부를 유지하던 [[조선]]이 광무개혁으로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국가를 통치하는 이념으로써는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유교라는 가치는 동아시아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와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전까지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가치 중 하나였고, [[한국]]에서는 아직도 유교적 가치[* 참고로 [[제사]]는 절대로 유교적 가치가 아니다. 유교가 생기기 전부터 동아시아권에서는 제사를 지내왔다. 적어도 한민족에서는 원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사를 지내온 것으로 추정된다.]와 유교적 문화가 남아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교란 [[예]]를 정하는 학문으로 예([[禮]])라는 것은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다.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단 이것이 약자에게 매우 불리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이론을 만든 것은 강자에게 의무와 책임을 지우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 군주에게 도덕적인 통치를 요구하는 '''왕도정치'''라는 개념과 신분에 걸맞는 책임을 요구하는 유교의 핵심이론인 '''정명론'''이 그 근거다.] 이렇기에 유교 교리의 핵심은 '''정명론'''[*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가 정명론의 내용이다. 즉 자신의 신분과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란 의미이며 이것은 지배층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과 정명론에 의한 지배층의 통제를 견제하고 지배층의 타락을 막기위해 존재하는 '''역성혁명론'''[* 왕이 왕답게 통치하지 않으면 왕이 아니니, 신하와 백성들은 왕답게 행동하지 않는 가왕을 폐위하고 정당한 새 왕을 추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이다. 유교가 다른 [[제자백가]]의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불교]]나 [[도교]]의 받아들여서 여러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유교는 정명론을 기반으로 쌓아온 학문[* 역성혁명론은 정명론을 견재하기 위한 이론으로 성찰적인 성격을 가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역성혁명론은 훈고학이 보편화 될 때부터 퇴색되었고 훗날 성리학이 보편화되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죽은 이론이 되었다.]이며, 뒤의 모든 이론은 정명을 구현하거나 실현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하다. 이 이론 중 가장 먼저 생겨났고 다른 이론의 근간이 되는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정명사상을 구현하고자하는 방식을 이론화한 것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학자들은 모두가 서로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그 이후에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봤으며, 그 이후에 붙은 부가적인 이론과 학설들은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