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충현 (문단 편집) == 사후 == 위충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죽이려했던 [[숭정제]]는 분노하여 위충현의 시신을 가져와 목을 베어 [[효수]]하였고, 그 시체는 [[오체분시]]도 아니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천참만륙(天斬萬戮)의 극형을 받게 했으며, 위충현을 찬양하던 사당과 상들 역시 모두 파괴되었다. 재산 또한 전부 몰수되었으며 일족들도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위충현의 영혼의 파트너였던 객씨도 무사하지 못하여 그의 사망 후 바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고문 끝에 그동안의 악행을 모두 자백했고, 그대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위충현의 아들을 자처했던 최정수는 끝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는지 마지막 잔치를 열어 그동안 모은 재산을 전부 탕진하면서 즐길 대로 즐기다가 관병들이 들이닥치자 목을 매어 자살했다. 물론 둘 모두 위충현처럼 부관참시되었다. 위충현은 갔지만 그의 수하들은 여전히 조정 곳곳에 남아있었다. 자신의 윗대가리들의 최후를 본 그들은 바로 태세전환해 상소문을 올리면서 위충현을 손절하려고 시도했고, 나중에 숭정제가 위충현의 수하인 오호 오표들을 정리하려고 하자 아주 가벼운 처벌만 내리는 등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미 이들이 위충현에게 보낸 아부 편지들을 전부 입수한 후였기에 봐주려고 했던 이들마저 전부 색출되어 청산되기에 이른다. 숭정 원년 엄당 구성원 총 261명이 숙청되었는데, 죄목에 따라 1등(위충현이 해당된다.)부터 8등까지 상세하게 분류되어 목이 잘리거나 삭탈관직, 유배 등 죄목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된다. 당시 지방 관리를 제외한 명의 총 관리 수가 800명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4분의 1이 칼날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한 셈이다. 이를 흠정역안이라고 부른다. 오호 오표들은 모두 처형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웃픈 해프닝도 있었다. 명말청초의 유명한 사상가 [[황종희]]는 아버지 황존소를 엄당의 옥사에서 잃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고문해 죽인 허현순과 최응원의 심리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그런데 증언을 끝내고도 나가지 않더니 불현듯 허현순에게 달려들어 송곳으로 마구 찔러버린 것이다. 관리들은 허현순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황종희를 떼어놓았으나 그러자 황종희는 최응원에게 달려들어 수염까지 뽑아놓았다. 결과야 어쨌든 위충현의 부하들은 대부분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목이 날아가지 않은 이들도 끝이 편치는 않았다. 동림당 인사들을 모함한 핵심인물인 고병겸은 관직에서 쫓겨난 후 집으로 돌아갔으나 성난 군중들이 집을 태워버렸고, 결국 쓸쓸히 죽었다. 마수에서 벗어난 이들이 딱 둘 있었는데, 왕체건과 유약우였다. 유약우는 글을 워낙 잘써서 엄당의 문건을 대부분 담당했기에, 엄당의 죄상을 상세히 기록하는 대가로 면죄부를 얻었다. 왕체건의 경우는 위충현의 심복이었음에도 7등 죄목밖에 받지 않았는데 정황상 일치감치 숭정 쪽으로 붙어 첩자 노릇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명나라]]를 어지럽힌 엄당과 위충현 세력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막장]]으로 치달아 있었고, 위충현이 죽은 지 불과 17년 만에 [[청나라]]의 침공과 [[이자성의 난]]을 끝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