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충현 (문단 편집) == 구천구백세, 추락하다 == 그밖에도 수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나라를 얼마나 말아먹었는지 열거하기 밑도 끝도 없지만 결국 [[천계제]]의 죽음과 함께 위충현의 명줄도 끝나게 되었다.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는 필사적으로 태아 상태인 황제의 아이를 황제에 옹립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만약 [[서아시아]]나 [[유럽]] 같았으면 위충현의 계획이 먹혔을 것이다. [[알폰소 13세]] 및 [[샤푸르 2세]] 항목 참조.]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천계제도 그렇게 무뇌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천계제의 황후인 효애철황후 장언이 위충현을 필사적으로 견제했기 때문. 특히 효애철황후는 위충현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천계제한테 소인배를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라는 충언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숭정제를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기에 숭정제는 형수한테 고마워하며 효애철황후를 황태후급으로 우대했다. 나중에 효애철황후는 명나라가 멸망할 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사후 이를 높이 평가한 순치제가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준다. 게다가 위충현과 객씨가 결탁해 한동안 황제의 아들들을 죄다 제거했기 때문에[* 천계 3년부터 5년까지 3명의 원자가 태어났지만 모두 요절했다. 앞서 말한 양련이 위충현을 고발한 것에도 황제의 자식을 죽였다는 혐의가 들어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황위 후계자는 숭정제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결국 위충현의 자충수였다. 어쨌든 천계제는 그나마 똑똑해보이는 동생 주유검에게 제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실제로도 천계제는 자신이 무식한 상태에서 천자가 된 것이 한스러웠는지 동생 공부는 좀 시켰다고 한다. 위충현은 황제가 죽자 부고 사실을 숨겨 숭정제의 제위를 막으려는 치졸한 짓까지 벌이고 심지어 정변을 일으킬 궁리도 해봤으나 전자는 장 황후가 이를 주유검에게 미리 알려줬고 후자는 위충현의 부하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주유검은 무사히 제위에 오르고, 숭정제로서 즉위하게 된다. 새로 제위에 오른 천계제의 동생 [[숭정제]]는 당연히 위충현을 적대했지만, 위충현을 바로 제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신하부터 환관들까지 전부 위충현의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움직이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터라[* 오죽하면 야사에서는 궁에 들어왔을 때 숭정제가 장 황후의 귀띔에 따라 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절 먹지 않고 본인이 밖에서 챙겨온 음식을 먹었으며, 스스로 검을 들고 잠도 자지 못하며 경계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숭정제는 위충현의 조카 위량경에게 면사철권을 하사하고, 엄당의 구성원들에게 상을 주는 등 위충현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음을 감지한 신하들은 발빠르게 위충현과 그 부하들을 탄핵하기 시작했고, 위충현은 결국 등쌀에 못이겨 사직을 선택했다. 숭정제는 처벌하지 않고 사직을 받아들이며 그를 '그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로' 고향인 봉양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때 위충현의 짐을 싸는 데만 해도 3일이 걸렸으며 그 결과 무려 수레 40대 분량이 나왔다고 하니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충현의 운명도 여기까지였다. 위충현이 베이징을 뜨자 숭정제는 기다렸다는듯 체포령을 내렸고 오호며 오표며 하는 그의 수하들도 차례차례 낙마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부성현에서 들은 위충현은 충격을 받고는 도망가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한 채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때 그의 짐을 나르던 수많은 하인들은 각자 재물을 챙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곁은 지킨 사람은 유일하게 이조흠밖에 없었고 이조흠도 위충현이 자살하자 따라 자살했다. 한때 황제를 호령하며 구천구백세를 자처하던 사람 치고는 비참한 최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