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충현 (문단 편집) == 나라를 가지고 놀다 == [[파일:external/imgtu.92lishi.com/1e0a91656e93c811275bd585d681b6cd.jpg]] 위충현은 [[1568년]] 2월 27일에 하간부 숙녕현의 한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위사(魏四). 젊었을 적에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도박 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가 어느 정도로 도박에 중독되었냐면 도박빚이 너무 많은 나머지 처를 버리고 딸을 팔면서까지 도박빚을 갚으려 했을 정도였다. 하루는 시정의 불량배와 도박을 하다가 판돈을 잃고 치욕을 당했다.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무식하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건 없었다. 이렇게 한 평생 남에게 무시를 당하며 비렁뱅이로 살 바에야 차라리 환관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환관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환관이 되려면 고환을 훼손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항생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에 이러한 행위는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환관이 되는 과정에서 거세를 한 뒤에 사망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그 때문인지 중화제국 왕조들이 [[조공]]을 받는 품목 중에 궁녀로 채용할 젊은 여성뿐 아니라 환관으로 쓸 화자([[고자]])도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 오죽했으면 환관을 제조하는 도자장들이 환관이 되길 원하는 사람에게 3번의 질문을 해서 약간이라도 망설일 경우 환관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는 목숨을 걸고 자기 손으로 고환을 훼손했다. 이후 위충현은 만력 17년(1589년)에 사례병필태감 손섬의 수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위사는 이름을 진충으로 개명했다. 진충은 무식했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잔꾀를 부리며 윗사람의 눈치를 잘 살폈기에, 얼마 후 손섬의 눈에 띄어 황궁의 창고, 갑자고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진충은 황궁의 창고지기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환관의 우두머리는 왕안이었는데, 그는 [[천계제]] 주유교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환관이었다. 왕안은 성품이 강직하고 정의감이 있었던 까닭에, 양심적인 동림당 계열의 대신들은 그가 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런 신망이 두터운 왕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황실 내부로 한 걸음 더 내 딛을 수 있었다. 진충은 먼저 왕안의 측근 위조에게 아부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 뒤 위조의 천거로 왕안의 문하로 들어간 진충은 왕안의 눈에 잘 보여서 주유교의 생모, 왕재인의 음식수발을 드는 전선의 직책을 맡았다. 진충은 왕재인에게 모든 인생을 걸었다. 그녀가 신분이 낮은 재인 출신이었지만 어쨌든 신종의 자손, 주유교의 생모가 아닌가? 훗날 주유교가 황위를 계승하는 날에는 왕재인이 [[태후]]로 등극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진충은 주유교의 [[유모]] 객씨에게도 접근했다. 본 문서에 인용한 조천항해록 내용의 '객 내저'가 이 객씨이다. 그녀는 일개 유모로, 주유교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더는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주유교는 객씨에게 유모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되어도 객씨를 총애하여 그대로 자금성에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눈치 빠른 진충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감지했다. 객씨는 위조와 [[대식]]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대식의 유래는 이렇다. 한국과 중국에서 당직을 서는 환관은 궁중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지고 온 차가운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녀는 궁궐에서 불을 지필 수 있었으므로 환관들이 평소에 친한 궁녀에게 음식을 데워달라고 부탁하면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이렇게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 밥을 먹으면 부부처럼 친해지기 마련이다. 환관과 궁녀 간의 이러한 은밀한 부부놀이를 대식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경우 명초에는 은밀히 행해졌으나 만력 이후부터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또 군주의 성은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궁녀들끼리 일종의 동성애를 즐기는 행위도 대식이라고 했다.] 위조는 왕안과 주유교를 섬기느라 객씨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진충이 그 틈을 노리고 원래 위조의 여자였던 객씨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나중에 가면 무슨 불륜관계로 발전해버려 둘은 천계제 몰래 간통까지 서슴치 않고 벌인다. 천계제는 이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키워준 유모라고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위충현은 엄연히 [[고자]]인데 대체 무슨 수로 객씨와 간통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보통 중국 환관과 달리 생식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거세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훗날 그는 황제의 어명을 가탁하여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결의형제 위조를 귀양 보내 죽이는 비열함을 드러냈다. 1620년인 태창 원년 9월 광종 태창제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졸지에 황위를 계승한 주유교는 객씨를 향한 연모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황제가 되었다. 내가 결정한 것이면 그것이 곧 국법이 되는 세상이었다. 그는 황제로 등극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객씨를 봉성부인으로 책봉했다. 객씨 일족은 하루아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객씨의 정부 진충도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궁궐의 땔감을 관장하는 석신사에서 사례감의 병필태감으로 승진했다. 이 직책은 각 부 대신들이 올린 각종 공문들을 선별하여 황제에게 아뢰는 일과 어명을 대신들에게 구두로 전달하거나 문서로 작성하여 알리는 일을 도맡았다.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과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원래 진충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였으므로 궁성에서 살아가는 환관이라는 직책이 요구하는 기본 교양 및 덕목이나 기본지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해 황제의 공문서를 처리하는 병필태감이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객씨가 막후에서 은밀히 영향력을 행사했던 까닭에 그는 문맹임에도 파격적인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진충은 희종의 눈과 귀가 되어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로지 희종이 향락에만 빠져 지낼 수 있게 했다. 천계제는 목수질이나 하게 냅두고[* 그래서 위충현이 신하들의 상소를 천계제에게 전달할 때는 꼭 천계제가 목공예에 열중일 때만 노려서 보고했다고 한다. 목공예 한참 빠져 있는데 불쑥 처리해야 할 국정 상소를 가져와 폐하께서 처리하셔야 한다고 하니 천계제는 짜증내면서 "아 니가 알아서 해"라고 내뱉었고, 그걸 또 위충현은 '황제께서 내게 맡기셨다'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고.]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설득한다. >천계제: "충현아, 요즘따라 정치고 뭐고 다 하기 싫구나. 짐은 망치질이나 하고 싶어." >위충현: "그렇다면 정치는 소신에게 맡기소서." 그는 천계제의 치세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온갖 전횡을 휘둘러 명나라를 급속도로 쇠락시켰다. 학식이라고는 없는 일자무식의 위충현은 그저 황제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대해온 환관이라는 계기로 벼락출세를 맞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