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안스카이 (문단 편집) ====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 하지만 이미 혁명 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 [[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을 결성한다.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위안스카이가 이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지만 1919년 쑨원이 재창당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통해 국가부흥과 정당정치를 수용하는 듯...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옛 심복인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공화사상에 물들어 말을 듣지 않자 압박하여 내쫓았고 1912년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혁명당원을 제거하는 한편 빌미를 잡힌 리위안훙을 굴복시켰다.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껴 만만한 외교관 출신의 [[루정샹]]을 총리에 삼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만만하자[* 국회의 반대에 아예 병원에 누워 집무를 거부했다.]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삼은 후 새 총리로 유력하던 전 농림총장이자 국민당 대리 이사장인 [[쑹자오런]]의 [[쑹자오런 암살 사건|암살]]을 사주하였다.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쑹자오런이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에 국민당이 반발하여 1913년 7월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이를 2개월 만에 간단히 진압했다.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 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무총리 [[슝시링]]을 겁박하여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 해산 이후에 정족수 부족으로 정회되어 유명무실해진 국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여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하면서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1914년 5월 1일에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법률로 보장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