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례성 (문단 편집) === 가설 3: [[몽촌토성]] - [[풍납토성]] 이원설 === 1980년대에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유력한 다크 호스로 떠올랐다. 《[[삼국사기]]》의 기술과도 맞는 데다, 발굴 결과 2~3세기 백제 유물품이 나왔기 때문. 그 이후 몽촌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가설이 거의 정설로 굳혀지나 했다. 국사책에서도 몽촌토성을 위례성이라 했으니.. 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을 발굴하면서 무게추가 확 뒤바뀌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부합하는 데다 몽촌토성에서 나온 양보다 훨씬 많은 유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한국 고고학계는 이 결과에 턱이 툭 하고 빠졌고, 고대사학계는 부랴부랴 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바꾸는 논문을 발표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풍납토성]] 참고. 그렇다고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고고학적 성과가 나오긴 했지만, 몽촌토성의 전례에 따라 고고학계가 신중하게 접근하는 중. 더구나 풍납토성이 한강 바로 옆에 위치했기 때문에, 유사시 과연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현재 고고학계의 대세는 평상시에는 풍납토성, 위기시에는 몽촌토성에 머물렀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위례성은 이 모두를 통칭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고구려에서도 [[안학궁]] - [[대성산성]]이나, [[국내성]] - [[환도성|환도산성]] 등을 이처럼 평시 성과 위기시 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학교의 역사 수업시간에도 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이라고 배우는 편이다. 현대에 서울의 시역이 넓어지다보니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위례성 지역까지 '서울'로 들어왔고, 훗날 조선의 수도 한성과 위례성이 둘 다 지금의 서울이라고 하니까 위례성과 한성이 역사가 이어지는 같은 도시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위례성'과 '한성'은 한강을 끼었다는 점만 빼고는 완전히 다른 도시이다. 전근대시대에는 한강 같은 큰 강 건너편이면 생판 딴 동네나 마찬가지였고,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강남 지역 대부분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군]]의 변두리였다. 이 부분은 [[서울특별시/역사]] 문서를 참고할 것.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백제의 위례성이 서울을 수도로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연속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이희진, 강찬석 공저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풍납토성 발굴 유물의 [[고고학]]적 절대연대가 기원전후까지 올라가는 것과 관련해 저자들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망명해 왔을 때 '마한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할양해주어서 그 토대 위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한 기록을 풍납토성이 실제 사실로서 증명해줄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병도]]가 처음 위례성이라고 지적했던 하남은 풍납토성이 있는 서울에서 보면 동북쪽 방향이었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온조 사당이 존재한다.] 온조왕이 사냥하는 척 하면서 합병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마한의 세력 거점이 풍납토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따를 경우 처음 마한의 소국으로 시작했던 백제가 이후 거꾸로 마한을 합병하고 세력을 넓혔다고 기술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고학적인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최근 풍납토성의 건축 연도가 기존 추정치보다 100년 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이 가설도 고려해 볼 점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