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삼국시대) (문단 편집) == 한국사와의 관계 == [[고구려]]와의 충돌이 유명하다. 사실 고구려는 처음부터 위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유는 동연이 고구려가 차지한 영역을 넘보면서 고구려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동연은 위나라와 우호 정책을 유지하면서 고구려와 마한 일대에 세력을 뻗쳐 장래를 기대한다는 의도였겠지만, 고구려와 마한은 그 전 한나라 시기와 달리 국력이 성장한 상태였다. 당초 의도했던 바와 달리 불필요한 마찰로 국력을 낭비하게 되었고, 고구려와 마한 제압은 시작도 못한 상태에서 위나라에게 등을 돌렸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와 위나라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우호적인 협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 때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고, 위나라가 [[공손연]]을 칠 때 고구려도 1,000명의 병력을 보내 도왔다. 일단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여 두 나라의 목표는 합치되는 듯 했으나, 위나라가 고구려는 한 게 별로 없다며 보상을 해주지 않자 당연히 고구려가 화를 내게 되었다. 고구려가 반발해도 위나라는 이를 묵살할 뀔 뿐이었고, 이에 격분한 고구려가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242년, [[동천왕]]이 병력을 보내 서안평을 침공했다. * 246년 8월, [[관구검]]이 1만의 병력[* 일설에 따르면 10만의 오기(오탈자)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위군은 1차 전투에서 3,000명 + 2차 전투에서 3,000명으로 6,000명이 죽었는데, 10,000명명 중 6,000명이 죽으면 사실상 전투불능이라, 25,000명의 대군을 상대해 1만 8천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10만 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다.]을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동천왕]]은 5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8,000명이었다.([[비류수 전투]]) 10월,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 259년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중천왕]]이 정예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 여명의 목을 베었다.([[양맥 전투]]) 한편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남은 기록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이 위나라의 짧고도 강력한 개입으로 복속시켜온 옥저, 동예 등이 고구려의 통제에서 도로 이탈하고 말았으며, 이후 다시 복속시켰지만 고구려가 한반도로 남하하는 흐름이 적어도 한 세대 정도 늦춰지고 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nguo_map.jpg|width=100%]]}}} || || {{{#000000 삼국의 실제 행정력을 묘사한 지도.[* 이 지도의 원본은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온 것이다.] }}} || 당시 위는 한나라를 계승하였기에 [[한사군]]도 그대로 지배하였으므로 한반도 이북도 위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 한사군이 소멸한 시기는 4세기 초반이다. 한사군의 경우 과대평가했다는 반발이 나올 법 하지만, 기준이 246년 [[기리영 전투]] 직후 시점이라면 다소 말은 된다. 기리영 전투 직전 [[비류수 전투]]로 동예와 옥저 일대가 낙랑의 관할로 들어가버린 데다, 기리영 전투 직후 마한 목지국과 관할 문제로 역시 갈등을 빚던 황해도 일대는 물론이요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부까지 대방군 관할이 되어 버렸기 때문. 또한 [[낙랑군]], [[대방군]] 만은 위나라가 요동의 [[동연]]을 복속시킨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관할한 건 맞다. 즉 위나라 지배 영역이 맞을 것이다. 물론 위나라 내군처럼 모든 관직을 중국인만 차지하고 세금 징수와 인력 징발도 내군 태수의 자의에 따르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배 영역 아니라고 할 순 없다. 변군이어서 현령 이하 관직은 현지인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었고, 세금 징수와 인력 징발 또한 현지인에게 전폭적으로 맡겼던 점이 다를 뿐.[*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서적 참조] 그리고 고구려와의 충돌이 주로 유명하지만 [[마한]]과 크게 충돌하여 [[목지국]], 신분고국을 비롯한 마한 주류 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그 결과 백제국이 별안간 급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한 나라 또한 이 삼국시대 위나라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연]]은 낙랑군과 대방군에게 삼한 일대의 교역권을 나눠주어서 한반도 남부에서 힘을 갖춘 국가가 나타나는 걸 방지했는데, 위나라는 이에 한술 더떠 아예 낙랑군의 교역권 자체도 마한과 [[진한]]으로 세분화하여 마한을 대놓고 견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마치 현대의 비양심적인 대기업이 독점 하청 기업이 장래에 경쟁 기업으로 클 수 있다고 통보도 없이 별안간 독점권을 폐지하고 발주처를 합의 없이 다각화하는 행태를 방불하게 하는데, 이걸 당하는 하청 기업이 화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마한, 특히 임진강 이북 소국들을 참을 수 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천안 청당동 [[목지국]]이 주도하는 마한은 위나라와 벌인 [[기리영 전투]]에서 패배했고, 황해도 및 경기도 동부, 강원도 서부의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그 결과 목지국 대신 낙랑군에게 충성하게 되면서 [[마한왕]]은 심각한 위상 실추를 경험한다.[* 소위 한반도 말갈로도 전해지는 '위말갈'이 바로 이 기리영 전투의 결과로 위나라의 강대한 힘을 체감하고 목지국의 리더십에서 이탈한 일부 마한 소국들이다.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 물론 '''목지국 마한왕이 잃어버린 리더십의 공백을 백제가 급성장해서 금방 채운 건 위나라와 목지국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태'''였으며, 그렇게 그렇게 강해진 백제가 목지국을 등지고 낙랑군에게 붙은 마한 일부 소국들을 모조리 타멸[* 이상하게도 3세기 중후반 시절에 위나라가 이 소국들을 거의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백제가 강해진 기정 사실을 인정하여 타협하려는 행동을 보인다. 원래라면 자국 보호 아래 있는 옛 마한 소국들을 보호해줘야 정상적인 데 말이다. 이때는 잠깐 침묵해 있던 고구려가 다시 기지개를 편데다 북방, 촉한, 오 등의 전장이 다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 게 이유로 생각된다.]하여 직접 지배령으로 편성하여 위나라 입장에선 그 전 마한보다 다루기 만만찮은 국가가 된 건 더 큰 나비효과였으나, 마한이 삼국시대 위나라의 낙랑군에게 받은 타격은 상당했다. 후대에 가져온 더 큰 나비효과는 위나라의 기리영 전투 승리 결과 위나라, 즉 낙랑군 및 대방군이 마한을 통하지 않고 [[진한]]과 직거래하게 되는 루트가 한동안 구축한 것이다. 사실 위나라가 마한의 무역 독점을 철폐하려고 마음 먹은 건 그간 진한의 실력이 마한 못지 않게 성장한 것도 큰 이유였다. 이 루트는 고구려가 서안평을 함락하여 서진의 한반도 영향력이 완전히 끝났음을 명명백백히 드러낸 4세기 초반까지 계속된다. 물론 백제가 이 시점에서는 임진강 하류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강원도 영서 일대까지 손을 뻗쳐 대방군-진한 직교역 경로 일부가 백제의 강역 안에 들어가버리고 말았긴 하였으나, 백제왕은 [[마한왕]]을 겸하긴 했으되 [[서진]]과 활발한 문물 교류 중이었기에 서진의 비위를 거슬르면서까지 위나라가 확립된 무역 관행을 고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진한-중국 직교역 루트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제대로 기능하여 사로국을 비롯한 [[진한]]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성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이후 신라는 이백 년이나 지나서야 한강 유역을 손에 넣어 백제와 고구려에게 가로막힌 중국과 직거래하는 경로를 뚫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