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삼국시대) (문단 편집) == 군사 == [include(틀:역대 중국/대만의 군사조직)] 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와 [[세병제]]가 실시되었다. 조조의 강병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갖추었다.[* 영토가 북쪽에 위치하여 북방의 유목 민족들과 거래가 많았다. 그래서 그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조위는 막강한 기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법이 매우 엄격하여 군사적인 배신자는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어서 벌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다른 나라에 항복한 자가 나오더라도 그 가족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던 촉한과의 차이점.[* 대표적 예로 황권의 아들인 황숭이 있다.] 내지 둔전은 조위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도겸]]은 [[진등]]을 전농 교위로 삼아 [[서주]] 경내에 둔전을 실행해 효과를 거두었고, 유주의 [[공손찬]]도 역경에서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비축했다. 그러나 대규모로 둔전을 운용한 것은 조조 정권이 처음으로 조조는 이들을 참고삼아 대규모로 내지 둔전을 실시했다. 조위의 둔전은 본래 민둔과 군둔의 구분이 없었는데 근대 학자들이 서술과 연구의 편리를 위해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지었다. 사실 둘을 명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민둔과 군둔의 공통점은 군량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군사 편제를 따랐다는 것이다. 유사시에는 민둔의 노역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오와 촉의 변경 지대 둔전객들은 방위의 임무도 겸했으며, 내지 둔전객들은 반란 등이 일어날 경우 징집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경제가 회복되며 이들을 군역과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단순 병력의 물량으로는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오와 촉은 물론 이민족들과 고구려에게도 압도적인 강국이라서 그들도 위와 맞설 생각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문제는 전선. 워낙 세력이 크다보니 단순히 촉, 오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 등도 고려해야 했기에 압도적인 수로 적을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이게 반영이 되지 않은 [[삼국지 13]]처럼 반란군이나 이민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창작물에선 정말 압도적이다.] 조위의 갑옷 제작 기술 역시 뛰어났다. [[조식(삼국지)|조식]]은 '선제사실개표'에서 흑광개, 명광개, 양당개, 환쇄개, 매개 등 다양한 갑옷의 명칭을 들고 있다. 이런 갑옷은 당시에는 매우 진귀한 고급품이었으나 후에는 군대의 주요 장비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마개는 전투마를 보호하는 갑옷을 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